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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Nov 23. 2017

 수능 이후의 삶

결국 달라진 건 시험지의 선택지와 주관식 문항이 늘어났다는 것뿐

올해 수능은 좀 특별하다. 지진이라는 천재지변으로 수능 역사상 처음으로 시험일이 일주일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오늘 여느 해와 같이 많은 수험생들이 수험장에 들어섰다.


수능시험에 대한 기억은 추운 날 아침, 아빠 차를 타고 수험장에 가서 후배들의 응원가를 들으며 고사장으로 향하던 낯선 운동장의 풍경과 제 2 외국어 답안지를 작성하고 얼핏 본 창밖의 어둠뿐이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 홀로 가채점을 하고 왠지 모를 허무감에 엉엉 울어버렸던 수능 이후의 삶은 비교적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 번의 시험으로 많은 이들의 희비가 갈렸던 그 시간이 지나고 내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처음 들어간 회사는 남들이 들으면 모두 알만한 곳이었고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보다는 거의 모든 일을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며 웃어넘길 수 있는 좋은 포지션의 업무를 맡았다. 업무상 마주쳤던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나이에 이런 일을 어렵지 않게 하니 앞으로는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며 입이 마르게 칭찬을 했었다. 그들의 말이 인사치레라는 걸 알았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당시 또래와 달리 논문 완성과 동시에 취업이 되어 '취업'이라는 커다란 장벽에 대한 고민도 그리 크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의 말을 믿으려 노력하면서 '그래, 이 정도면 잘 살고 있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재미없게 느껴지는 어떤 순간이 왔다. 10년 뒤 내 모습을 생각해보니 내가 원하던 삶과는 완벽하게 다른 것 같았다. 퇴사를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작년 이맘때였다.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동생은 수시 면접을 보러 다녔고 수능시험을 봤다. 나도 마치 이제 막 시험을 마친 수험생처럼 이전에 나를 가두던 것들로부터 해방감을 느꼈고, 내가 쏟았던 모든 노력에 왠지 모를 허무감을 느꼈다.  


퇴사를 하고 여행을 다녀와 프리랜서로 다시 이런저런 일을 했다. 이상하게 느껴지는 허기 때문에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했다. 딱히 맛있지도 않은 음식을 허겁지겁 입으로 밀어 넣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다이어터 같아 스스로가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디에 속하지 않고 일을 한 지 1년이 되어갈 무렵, 회사를 다니며 만났던 몇몇 사람들이 안부를 물어왔다. 무슨 일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나를 치켜세우던 이들은 너무 자연스럽게 자그마치 1년을 불안정한 노동자로 살아온 내게 자신만의 잣대를 들이대며 오지랖을 펼치기 시작했다. '욕심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혹은 '그런 식이라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그들에게 이익이 될 가능성이 있는 회사, 직급에 있다가 소속이 없이 떠도는 불안정한 노동환경으로 나를 둘러싼 상황이 변했을 뿐이다. 불과 1년 전 그들의 눈에 매우 가능성 있던 젊은이는 지금 그럴싸한 곳에 '재취업'을 목표로 해야 하는 수능만큼이나 버거운 장애물을 앞에 둔 88만 원 세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수능 이후의 삶은 늘 수능 이전의 삶과 다를 것이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 밤 11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하루 15시간씩 부대끼던 친구들이 없다는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수능의 벽을 넘고, 취업의 벽을 넘어도 새벽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하고, 밤 11시까지 야근을 하고, 하루의 상당 시간을 직장 동료들과 부대껴야 하는 상황은 여전히 발생했다. 10대의 마지막 장벽을 넘었다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전에 새롭게 부딪히는 상황들 덕에 나름 견고하게 나를 이루던 모든 가치관이 산산조각 나 흩어져 버렸고, 나날이 높아져 가는 사회의 기준에 나를 끌어올리기 바빴다.




지금쯤이면 수능시험을 모두 마친 수험생들이 수험장을 나와 친구와 가족을 만나 맛있는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나'로 살아온 시간보다 '학생' 정확히는 '수험생'으로 살아온 날들이 더욱 길었던 수험생들에게 정말 수고했다고, 그 긴 시간을 잘 견뎌내어 대견하다고 몇 번이고 토닥여주고 싶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새벽, 가채점을 하고 기쁨에, 슬픔에, 허무감에, 속 시원함에 한가득 눈물을 쏟아낼 수험생에게 '수능 이후의 삶도 그리 다르지 않으니 너무 좌절할 필요가 없다고'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상황은 언제나 바뀔 수 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성공의 길을 가기 위해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겠지만 신이 아닌 인간은 언제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다.



선명한 변화의 자국을 보자마자 이때다! 하고 당신의 인생에 자신의 잣대를 들이밀며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들의 말에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릴 만큼 힘든 친구들이 있다면 자신을 어떤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더 큰 좌절을 향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해방감에 기쁜 친구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수능 이후의 삶은 수능 이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 이 사실은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큰 위로가 된다.


이 글은 사실 여전히 수능을 앞둔 수험생 같은 기분으로 몇 달을 살아온 내가 나에게 주는 위로의 글이기도 하다. 선택지가 많아지고, 주관식 문항이 늘어난 시험지를 받아 들고 몇 번씩 답안지를 고쳐가면서 전전긍긍하는 20대 후반의 나에게 이 시간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이럴 때일수록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온전한 '나'로서 머무는 시간이 더욱 필요한 것이라고 위로하는 글. 오늘 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은 일단 수고한 자신에게 듬뿍 위로와 칭찬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젠 정말 '나'로 살아가야 할 시간들이 남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어떤 모습이든 '나'를 '나'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마치 20대 후반의 내가 수능만큼이나 큰 장벽 앞에서 숨을 고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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