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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Oct 23. 2015

엄마의 자소서

고쳐 쓰고 싶지 않은 엄마의 이야기 

드라마 <두 번째 스무 살>이 끝났다. 바쁜 일정에도 꼬박꼬박 챙겨보던 드라마였다. 너무 작위적인 설정과 오그라드는 극 중 상황들이 썩 내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챙겨보았던 건 주인공인 '하노라'에게서 우리 엄마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내년으로 딱 오십 세가 되는 우리 엄마. 늘 어린 새댁, 어린 엄마였던 나의 엄마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면서 나는 다양한 글을 읽고 쓰게 되었다. 생계를 위해 혹은 흥미를 위해 장르 막론하고 글을 쓰고 있지만 최근 가장 많이 읽고 쓰는 건 다름 아닌 자소서(라고 쓰고 자소설이라고 읽는다)이다. 심지어 나의 자소서가 아니라 친구, 친구의 친구, 언니의 친구, 선배, 후배의 자소서다. 1년 사이에 대기업 두 곳, 은행권 한 곳, 공공기관 두 곳에 내 손을 거친 자소서가 통과된 걸 보면 능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솔직히 난 지인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자소서를 쓸 이유가 없었다. 나에게 자기소개서를 가져오라는 업체는 없었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면 충분했다. 내가 주로 쓰는 글은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단편 영화 시나리오 같은 픽션이다. 픽션이야 상황과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흥미롭게 배치하면 그만이지만 자소서는 한 사람의 지난 시간을 밑천으로 써 내려가는 것이기에 그 사람이 살아낸 흔적들을 지우고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나'에겐 여전히 '남'의 이야기인지라 비교적 자유롭게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에 맞춰 그들의 경험을 풀어낼 수 있었다. 또 여전히 '남'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불필요하거나 맥락에 맞지 않는 경력들은 과감하게 삭제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내게 일기를 적은 수첩들을 여러 권 내밀었다. 나에게 이 수첩들을 건네기까지 수 백 번을 망설였다는 엄마는 얼굴까지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딸, 엄마 글 좀 봐줘. 나도 이제 글 쓰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마치 자소서를 내밀며, 나의 지난 삶을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봐달라는 이십 대 내 또래와 다름없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난 세상에서 가장 길고, 비형식적인 엄마의 자소서를 읽게 되었다. 



엄마 자소서의 주인공은 엄마가 아니었다. '아빠'였고, '언니'였고, '동생'이었고 '나' 자신이었다. 엄마의 하루는 엄마의 것이 아니었다. 엄마의 속상함은 육체적으로 힘든 일 때문에 자꾸만 술을 마시는 아빠 때문이었고, 엄마의 근심은 유난히 몸이 약한 '언니' 때문이었다. 엄마의 행복은 식사시간에 종알거리며 밥을 먹는 '자식들' 때문이었고, 엄마의 자부심은 비교적 안정되어가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로부터 비롯되었다. 엄마가 적어 내린 시간들엔 나의 하루하루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게 난 다시 유년으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난 호불호가 굉장히 분명한 어린이였다. 어른들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고 짓궂게 물으면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엄마가 훨씬 더 좋아요.

난 정말 엄마가 좋았다. 내 기억 속의 아빠는 거칠었다. 물론 사람은 잘 변하지 않기에, 여전히 우리 아빠는 거칠고 무뚝뚝하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스물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스물넷에 날 낳은 엄마는 젊었고 예뻤고 똑똑하고 자상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전과를 보며 나와 함께 공부를 해주기도 했다. 그런 엄마를 난 늘 사랑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아  전전긍긍했다. 

이미지 출처 : kafepauza.mk


내가 엄마를 사랑한 이유와 같은 이유로 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 우선 엄마는 너무 일찍 결혼해버렸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잘 모를 나이에 엄마는 '혼자'가 아닌 '둘'의 삶을 시작했다. 심지어 당시 아빠는 무직이었다. 아직 대학 공부도 다 마치지 않았던 엄마였다. 엄마의 친구들은 엄마가 학창시절 전교 1등을 도맡아하던 만년 반장이었다고 말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엄마는 결국 학업의 길을 포기하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갔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엄마에게 육아는 육체보다 마음이 고된 일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따듯한 사람이었지만 지나치게 엄했다. 귀가 시간을 조금만 어겨도 사랑의 매를 맞았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숨 막히는 교육이었다. 당시 엄마에게 육아는 '관용'과 '사랑'보다는 '학습'과 '의무'가 앞서게 되는 그런 일이었다. 훗날 서러움을 토로한 나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렸어. 

엄마는 어렸다. 워낙 책을 많이 읽으셔서 지식과 교양이 많은 분이셨지만, 남들이 믿고 채용할 만큼의 객관적 지표는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빠와 함께 가게를 운영하시긴 했지만, 그 좁고 좁은 공간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외로운 시간들을 견뎌내는 것이 엄마가  꿈꾸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몇 달 전, 아빠가 수술을 하셨다. 블루칼라인 아빠의 체력은 환갑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모두 바닥나버렸다. 예상했던 일이었고, 자식 된 입장으로 무척 속상한 일이었다. 언니와 나야 알아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아직 고등학생인 동생을 생각하면 아빠의 입장에선 경제활동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엄마는 작은 카페를 차리고 싶어 하셨다. 처음으로 자신의 '일'을 찾아 사회에 발을 내딛으려던 엄마는 홀로서기를 하기도 전에 완전히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내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  일뿐이다. 가게를 내기 위해 대출을 받고 싶은데, 신용 기록이 없는 나는 대출도 받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난 남편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만 살아왔다. 다른 여자들도 다 그렇게 살았겠거니 마음을 추슬러보지만 속상해 눈물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혼자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혼자 할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이 비참했다. 


엄마는 날 보러 서울에 올 때마다 길을 찾기가 어렵다며 역으로 데리러 오라고 어리광을 부렸다. 난 모시러 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짜증을 냈었다. '그걸 왜 못 찾냐며, 혼자서 길도 못 찾는 게 말이 되느냐'며 엄마를 타박했다. 엄마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길을 못 찾아서가 아니라, 혼자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딸의 얼굴을 조금 더 빨리 보고 싶어서 그랬을 텐데 못난 딸은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엄마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엄마의 자소서는 카페 창업의 꿈에서 좌절되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엄마 '본인'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했고, 삶이 퍽퍽하게 돌아가지 않도록 즐거움의 윤활유를 하나씩 발견해가고 있었다. 남편, 자식들 감정에 대한 엄마의 감정이 아니라 그냥 하루를 살아낸 '엄마 자신'의 감정을 적어내기 시작했다. 


엄마의 경험엔 아빠의 삶이, 자식들의 삶이 농밀하게 축적되어 있었다. 자소서에 단골로 등장하지만 막상 취준생들은 할 말이 없는 "당신의 인생에서 역경을 겪은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지 그리고 그 역경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서술하시오"란 질문은 엄마에게는 가장 길게 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실 엄마의 삶에 엄마는 없었다. 아빠의 성취가, 자식들의 성취가 엄마의 성취가 될 순 없다. 자소서를 컨설팅하는 입장에서 엄마의 자소서는 대한민국의 한 여성으로서 어떤 능력을 증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고쳐 쓰고 싶은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이렇게 여러 명의 삶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tumblr

최근 날짜의 엄마 자소서에는 남편, 자식이 아니라 '엄마 자신'의 감정이 적혀 있었다. '스스로에게 여유를 주기 시작했다'는 부분에서 엄마도 이제 '엄마'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멋지게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미래가 기대되는 구절이었다. 엄마의 자소서는 세상에서 가장 진부한 이야기고, 가장 평범한 중년 여성의 이야기지만 그리고 여전히 내가  꿈꾸는 미래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난 한 줄도 고쳐쓸 수 없었다. 그 진부한 이야기 속에 우리 가족의 삶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자소서는 아직 많은 페이지가 남아있다. 다 읽지 못했지만 얼마 읽지도 않고 난 엄마가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귀찮아하지 않고, 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모두 내었던 엄마에게 나의 작은 시간을 내어주고 싶다. 응원하고 싶다. 엄마의 새로운 이야기를  하루빨리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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