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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Oct 29. 2015

이 책은 읽지 말 것

당신 마음에 아픈 구절을 남기는 사람이라면 가까이 두지 말 것 


한 사람의 인생은 흔히 한 권의 책으로 비유된다. 만약 나의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난 어떤 장르의 책일까? 내가 즐겨 읽는 SF소설일까, 아직까지도 모으고 있는 동화책일까, 마음이 편안해지는 수필일까, 한 구절에 마음을 빼앗기는 시일까. 아니면 굳이 찾아 읽지 않는 자기계발서일까. 


나를 한 권의 책으로, 주변 사람들을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보면 꽤 재미있는 세상이 펼쳐진다.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책장을 이루는 수많은 책들 중 하나. 살아 있는 동안 결국 우리는 한 권의 책을 완성하기 위해 저마다 열심히 살아간다. 




어린 시절, 아니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난 상처에 취약한 사람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상처받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받았던 심리검사 결과는 그런 내 성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순응적이고 타인친화적인 성향이 가장 많이 드러났고 이에 완전히 모순되는 철부지 미운 일곱 살의 성향과 타인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독재자적 성향이 비등한 비율로 높게 나타났다. 


오랜 기간에 걸쳐 잘 다듬어진 사회성은 거칠과 강한 나의 본성을 가두고, 타인의 시선이란 철통 경비를 세워 스스로를 철저하게 감시해왔다.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았고 착한 아이, 좋은 친구,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당연히 스트레스에 쉽게 노출되었고, 결국 위험한 사람이 되었다. 


ⓒ온라인게시판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의 난 호기로왔고, 씩씩했다. 학부 때부터 프리랜서로 일을 했고 평가도 좋았다. 조언보다 많은 칭찬을 들었던 덕분에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사회에 나간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만신창이가 되었다. 세상에는 내가 '잘 해야만 하는 일'들이 끝도 없었다. 


내가 '잘 보여야만 하는 사람'도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춰야 내가 좋은 사람이 된다고 믿었고, 그 믿음의 저변엔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혼자 두 달을 몸부림 치다가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지쳐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정말 단 1초도 견딜 수 없이 번아웃이 되고 나서야 하루 휴가를 냈다. 날 사랑해주는, 내가 사랑하는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눈 앞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선생님을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선생님이 내 눈 앞에 도착하셨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한참을 소리내어 울었다. 눈 앞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서도 한참을 울었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대신 나와 같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 선생님을 보자 괜히 민망해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 지속할 이유를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대부분의 이유는 '타인'을 의식해서, '타인'에게 나쁜 평을 듣게 될까봐였던 것 같다. 실컷 울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제자를 선생님은 한참 토닥여주셨다. 제풀에 지쳐 울음을 그쳤을 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진 몰라도,
세상은 생각보다 너에게 관심이 없단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마음이 편해졌다. 선생님 말에 공감할 수 없으면서 괜히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응어리졌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도 같았다. 


선생님은 조용히 웃으시며 "네가 정말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이 된 것 같아 대견하고 기특하다"고 말씀하셨다. 다 식은 커피를 마시려는 내게 따듯한 코코아 한잔을 시켜주시며 세상에서 '너'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너 자신 뿐'이니 이런 순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소리는 가슴 깊은 곳에서 나는 소리 밖에 없다며 다독여주셨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로 책장을 채워가느라 정신이 없다. 가끔 호기심에 이런 저런 책들을 넘겨 보기도 하고, 우연히 읽은 책에 빠져 책 읽기에 열중하기도 한다. 숙제처럼 던져진 책을 억지로 읽기도 하고, 더 나은 책을 완성하기 위해 조금 지루한 책이라도 인내를 가지고 다 읽어내기도 한다. 


손으로 일일이 베껴 적으며 간직할 정도로 좋은 구절이 있는 책을 발견하기도 하고, 실수로 내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책을 읽을지도 모른다. 표지가 정말 예뻐서 펼쳤는데 내용은 하나도 없는 부실한 책을 발견하기도 하고, 퀴퀴한 냄새에 누런 종이 재질을 가진 옛 책이 평생 간직하고 싶은 책으로 남기도 한다. 


친절하고 재미있게 쓰여진 책이 있는가 하면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야만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책도 있다. 대중에게 널리 읽히는 책이 있고, 모두가 읽진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책도 있다. 세상에 아주 많고 다양한 책들이 존재하듯 우리네 인생도 아주 많고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일기 검사를 하면, 선생님이 늘 틀린 맞춤법이나 글자를 빨간펜으로 교정해주셨다. 글짓기 수업도 원고지 문법에 맞춰 글을 잘 쓸 수 있도록 선생님의 빨간펜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난 글 쓰는 법을 배워갔고, 일정 시간이 지나자 누구도 내가 쓴 글에 빨간펜을 긋지 않았다. 


ⓒcarolineadderson


내가 쓴 글에 '옳다', '그르다', '이렇게 써야 한다' 등을 알리는 빨간펜을 그었던 유년 시절은 아마도 내 인생이라는 책의 서문을 장식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지도를 받고, 간섭을 받으면서 '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그 시기는 책에서 극히 일부를 차지하는 '서문' 정도일 것이다. 이제 서문을 덮고, 진짜 나만의 본문을 적어내려 가야 할 때가 왔다. 그게 바로 어른의 삶인 것이다. 


선생님과 나는 인생을 책으로 비유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곤 했는데,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누군가 너의 글에 조언을 할 수 있고
넌 그 조언을 받아들여 글을 쓸 수 있겠지만,
그 누구도 너의 책장에 빨간펜을 긋게 해선 안 돼.
왜냐하면 이건 온전히 '너 자신'의 책이니깐. 

그렇다 선생님의 말대로 '어른'은 타인이 내 책장에 흠집을 내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막아낼 수 있어야 한다. 내 마음에 상처가 되는 구절로 가득 찬 책이라면 과감히 덮고 다시는 펼쳐보지 않는 냉정함도 필요하고, 내 마음에 상처가 되더라도 도움이 되는 구절이라면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서 적절히 참고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익숙한 장르의 책이 아니라 새로운 장르의 책을 펼쳐 읽을 용기가 때론 필요하고, 지겹도록 읽은 책을 과감하게 접어 책장에 꽂을 용기 또한 필요하다. 혹시 누군가 내 책장 한 켠에 낙서를 하려고 한다면 필사적으로 막아내야 한다.    


ⓒbookbabyblog


간혹 내가 써내려가는 책에 대해 질문을 받을 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질문은 좋은 것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을 해주는 사람을 많이 보진 못했다. 그래도 스물 한 살에 만난 선생님 덕에 미처 자라지 못한 나는 마음껏 질문할 수 있었고 평생 잊혀지지 않을 좋은 답을 얻었다. 


선생님의 품을 벗어나 진짜 사회에 나왔을 때 질문이 종종 누군가를 넘어뜨릴 수 있는 무기가 된다는 걸 알았다. 정말 궁금해서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질문,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한 질문들은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는 걸 목격했다. 


너무 힘든 시간의 끝, 선생님을 찾아갔다.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따듯한 코코아를 리필해주던, 내 질문에 소리없는 울음으로 답하던 그녀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녀를 통해 모든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세상 모든 책을 정독할 필요가 없듯 모든 질문에 답을 할 필요는 없다. 나 또한 타인의 책에 비교적 쉽게 들이대던 날카로운 물음표를 의식적으로 줄이기 시작했다. 대신 어떤 장르의 책을, 어떤 이야기로 채워갈지 고민하기로 했다. 


나만의 본문을 완성하기 위해 한줄 한줄 고심해 써내려 간 타인의 구절을 존중하기로 다짐한다. 무엇보다 누군가 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운해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한정된 시간을 살고 있을테니... 마음이 편해졌다. 너무 읽어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해 어느 한 구절에도 집중할 수 없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내 눈 앞의 구절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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