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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Nov 08. 2015

구멍의 날

구멍은 늘 메워야 하는 숙제처럼 느껴졌다.

구멍 1.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
        2. 어려움을 헤쳐나갈 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비가 내린다. 어제 밤부터 쉬지 않고 내린다. 어제 밤에는 우산이 없어 비를 맞았다. 오늘은 비를 피해 약속도 취소하고 하루 종일 이불 밖을 나오지 않았다. 어제 맞은 비 때문인지,  지난주 첫 출근을 했기 때문인지, 새벽녘에 혼자 마신 맥주 때문인지 토요일인 오늘 난 좁은 내 방 안에서 홀로 정체되어 있었다.


구멍이다. 오늘은 구멍의 날이다.


정신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채우기만 하고 좀처럼 비우지 못할 때가 있다. 무엇을 채웠는지, 무엇을 비워야 속이 시원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난 분명 느낄 수 있다. 비울 때가 되었다. 구멍이 필요하다.

이미지 출처 : waitingtobeknown.com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구멍'은 매우 부정적인 어휘였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는 누군가 "그 여자, 완전 우리 팀 구멍이야  구멍"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괜히 마음이 뜨끔! 그 구멍이 내가 아닐까 불안했다.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져 그런 불안에서 벗어난 뒤에도 '구멍'은 어쩐지 메워야만 하는 숙제처럼 느껴졌다. 반드시 채워야 할 부분에 생긴 '빈 틈' 그것이 어린 내가 생각하는 구멍이었다.   


어느 정도 구멍에 대한 공포를 이겨낸 뒤에 난 구멍에 '공허함' 그리고 '인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부지런히 움직인 시간 덕분에 모든 것을 채우려는 강박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비우는 것에 대한 불안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비우고 난 뒤에는 무언가를 잃은 것 같은 기분에 공허했고  또다시 불안해졌다.

이미지 출처 : Untitled(2010) by Susan Weisberg

나는 늘 모든 것(도대체 무엇을?)을 비우고 가볍게 살아가고 싶어 하지만, 좀처럼 비우질 못한다. 비우고 난 자리가 주는 공허함을 견뎌내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득 채워져 있을 땐 잘 모르지만, 비우고 나면 그게 무엇이든 늘 비워낸 흔적이 남는다.


구멍이 막연히 두려웠던 시절, 난 내게 난 구멍을 모두 숨기려고 했다. 채울 수 있는 건 채웠고 숨길 수 있는 건 숨겼다. 내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구멍은 생겼다. 그리고 난 그 구멍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미지 출처 : Untitled(2010) by Susan Weisberg

어쩌면 비워낸 흔적은 상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무엇을 비워냈는지 알 수 있겠지만,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낸 구멍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다. 누군가에 의해 난 구멍인지, 부족함으로 생긴 구멍인지 혹은 내가 필요에 의해 낸 구멍인지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내게 난 구멍들을 계속 자세히 관찰하다 보니 이제 난 '구멍'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미숙한 나는 아직 어디에 구멍을 내야 할지 얼마큼 구멍을 내야 할지 모른다. 또 비워내고 남은 구멍의 흔적에 여전히 공허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 그 공허함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력이 조금 생겼고, 조급하게 구멍을 메우기보다 이 구멍에 어떤 것을 채워야 할지 혹은 계속 비워두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미지 출처 : Quartet (2010) by Susan Weisburg

지금 내가 하는 '구멍' 이야기에는 구멍이 많다. 지극히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며, 모순적이다. 읽는 이에 따라 구멍은 다르게 해석될 것이고, 누군가는 구멍이 도대체 어쨌다는건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결론은 없다. 사실 일목요연 정리하거나 정의 내리고 싶지도 않다. 특정 일화를 써 내려가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구멍'이 가진 두 가지 뜻을 다시 한 번 생각해주길 바란다.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
혹은 어려움을 헤쳐나갈 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오늘은 구멍의 날이다. 홍차 한 잔을 진하게 우려서 나의 구멍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날. 가끔 구멍이 남긴 상처들을 건드려보기도 한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픈 상처, 이제는 아무리 만져도 아프지 않은 상처. 이미 파인 구멍을 들여다 보는 일은 지루하고 때때로 비참한 일이다. 하지만 구멍이 남긴 흔적들은 미래의 일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난 구멍의 날이 좋다.


구멍의 또 다른 이름은 '솔직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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