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라걸> 후기 - 이기기 위해선 '힘'과 '인내'가 필요하다
*본 후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되도록 후기를 읽지 않고 우선 영화를 보시길 추천합니다.
여자는 힘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방금 우리가 세상을 이겼네요.
They think women aren’t strong enough but we just beat the world.
2015년, 세계 최대 경마대회인 멜버른 컵에서 155년 역사상 처음 우승컵을 거머쥔 여성 '미셸 페인'의 우승 소감이다.
영화 <Ride like a girl>은 여전히 살아있는 기수, 미셸 페인의 일대기를 그린다. 기수는 말을 타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경마는 일반적인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기수에 대한 관심이 드물지만 호주에서는 전 세계 사람들이 주목하는 경마대회, '멜버른 컵'이 열린다.
경마라는 스포츠 자체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경마의 역사가 깊게 자리 잡은 호주에서도 '여성'기수는 익숙하지 않은 존재다.
분명 여성에게 불가능한 스포츠가 아니고, 여성의 참가권이 제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 기수로 살아가는 건 그 자체로 힘든 선택이 된다. 155년 경기 역사상 첫 '여성' 우승자라는 미셸 페인에 대한 수식어가 그 어려움을 여실히 증명해낸다.
155년 동안 멜버른 컵에 참가한 여성 기수는 단 4명, 그들이 대회에 참가하면 '기대'보다는 '걱정'과 '야유'를 받았다. 여자는 늘 마지막 100m에서 '힘'이 부족하다며 미셸 페인의 참전을 반대하는 마주들에게 미셸 페인은 이렇게 말한다.
미셸 페인은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다. 형제, 자매들은 모두 말을 탔고 미셸 또한 소파보다 마구간이 편한 말 덕후로 자랐다. 미셸 페인은 어른이 돼서도 '꼬맹이'라고 불리는 한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지만, 한 번 결정하면 신이 찾아온대도 절대 그 결정을 바꾸지 않을 강단 있는 기수가 된다.
사랑하는 브릿짓 언니를 낙마로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타는 것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을 사랑하지만 말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여럿 잃은 '패디'는 막내딸이 안전한 길을 가길 바라면서도 미셸의 스파르타 선생을 자처하며 혹독한 기초 훈련을 시킨다.
아버지 패디의 반대를 무릅쓰고 더 큰 무대에 나가기로 결정한 미셸에게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100가지도 넘는다. 남성 기수였다면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자리도 얻기 어렵고, 좋은 말을 타기 위해 수백 번 거절당한다. 좀처럼 쉽지 않은 좋은 말을 탈 기회를 얻기 위해 3일 간 3kg을 빼기 위한 훈련을 견디기도 하고, 불공정한 심사결과에 좌절하기도 한다.
그리고 겨우 선두 그룹에 들어갔을 때 모든 기수가 두려워하는 '낙마'를 경험한다. 심한 뇌출혈로 수술을 하고 골절과 뇌손상으로 힘든 회복 시간을 가지게 된다.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은 미셸이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여자로서, 평범한 인간으로서 행복을 누리길 권하지만 그녀는 다시 레이스를 선택한다.
기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 멜버른 컵을 향한 미셸의 도전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멈추지 않는다. 모두가 여성 기수의 우승 가능성은 1% 미만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미셸에게 '여성'은 그저 훈련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셸 페인을 멜버른 컵 우승을 처음 거머쥔 '여성' 기수로 기억하지만, 미셸의 훈련 기록을 보면 정말 우승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기수'로 미셸 페인을 기억하게 된다. 꿈을 향한 열정과 집념 그리고 남성 기수들보다 조금 더 가졌던 '인내'가 미셸 페인을 그 자리에 있게 했을 것이다.
영화 <Ride like a Girl>은 트리플 F 등급을 받았다. F 등급을 받기 위해선 아래 3개의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하면 되는데, 이 영화의 경우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 트리플 F 등급을 받았다.
첫째, 여성 감독의 연출
둘째, 여성 작가의 각본
셋째, 중요한 역할의 여성 캐릭터
영화의 감독, 레이첼 그리피스는 자신이 제인 캠피언과 같은 앞선 여성 영화인들이 해냈기 때문에 자신도 언제가 할 수 있으리라는 마음을 먹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 영화가 오직 여성들만을 위한 영화가 되지 않길 원한다고 강조한다. 아래는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영화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싶지도 않고, 영화를 본다고 사람들이 기존 편견들을 그리 부끄러워할 것 같지도 않지만 그저 우리의 영웅이 된 미셸 페인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그 자취를 따라가다 눈물을 흘린다면, 세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레이첼 그리피스의 인터뷰처럼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해서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여성 기수는 많지 않을 것이고, 그 삶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비단 기수들의 세상에서만 존재하는 문제도 아닐 것이다. 오늘도 꿈을 향해 꿋꿋이 노력하는 수많은 미셸 페인이 소중한 하루를 채워가고 있을 것이다.
많은 스포츠 영화가 그렇듯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졸이게 된다. 특히 말이 달리기 시작하면 두 손을 꽉 쥘 수밖에 없다. 주인공이 여성이 아니라 미셸 페인만큼의 노력을 하는 기수의 이야기 었더라도 감동은 충분했을 것이다.
우린 종종 '결과' 앞에서 노력을 잊기 마련이다. 또 어려운 현실 앞에서 꿈을 놓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셸 페인의 말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이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힘' 그리고 '인내'라고.
이밖에 영화에는 미셸 페인의 든든한 조력자였던 오빠 스티비가 직접 출연해 연기한다. 다운증후군이지만 말 관리사로 전문성을 키워가는 그의 도전 또한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