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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Nov 18. 2015

괴롭힘의 이유

너에게 묻고 싶다. 괴롭혔던 이유가 아니라 이제와 사과하는 이유를

늦었지만 미안했어.
그땐 내가 너무 못됐었지?

작년 이맘 때였던 것 같다. 겨울 코트를 입기엔 오버스럽고, 카디건이나 야상만으로는 너무 추웠던 11월 초순. 추울 땐 소주로 몸을 데워야 한다고 친구들과 오징어 내장탕에 소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한 건, 자정이 다 돼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평소였다면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지 않고 무시했을 테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 나 Y야. 기억하지?  지난달 병원에서 마주쳤던."


Y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지금은 작은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난 중학교 시절 3년을 같이 보낸 동창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어린 시절, 난 굉장히 힘이 센 아이였다. 빼빼 마른 몸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힘이 센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선수를 했고, 단 한 번도 누구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선수 생활을 이어갔고, 활발한 성격 덕분에 주변에 친구도 많았다.


드세보이는 이미지 때문이었는지, 힘이 무척 세다는 소문 때문이었는지 입학을 하고 갓 친해진 친구들은 소위 말하는 '일진' 아이들이었다. 사실  그때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운동부에 소환되느라 방과 후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물론 수업시간을 제외한 시간에 교실에 앉아있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도 교실에 가면 유난스럽게 날 반겨주는 친구들이 싫지 않았고, 어린 마음에 교실 분위기를 주도하는 친구들이 나와의 우정을 과시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침 7시에 학교에 나가 아침운동을 하고, 9시 20분에 들어가 수업을 들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점심을 먹고 강당으로 가서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고, 방과 후에는 강당에 모여 운동부 친구들과 훈련을 했다. 훈련이 끝나면 다른 학교의 팀들과 연습 경기를 하고 자정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말 그대로 몸이 고된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간만에 점심 운동이 없어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급식을 먹고 교실이 떠나가게 놀고 있었는데 친구 녀석 하나가 '재미있는 일'이 있다며 구경을 하라고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갔더니 친구 녀석이 같은 반 친구를 화장실에 가두고 입에 걸레를 물리는 것이 아닌가! 너무 뜨악스러워서 하지 말라고 뜯어말렸는데 친구 녀석은 자신이 초등학교 때 이 친구에게 똑같이 당했던 것이니 말리지 말라고 했다. 함께 놀던 친구들은 웃으면서 그 녀석의 '복수'를 지지해주었다. 충격적이었다. 그날 이후 걸레를 물었던 친구를 볼 때마다 괜히 내가 민망하고 미안해서 교실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오히려 강당 바닥에서 운동부 친구들과 구르며 운동을 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진짜 사건은 며칠 뒤에 벌어졌다. 반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 자리에 오더니 교무실에 가보라고 했다. 교복으로 갈아입지도 못하고 교무실에 갔는데, 함께 놀던 친구 녀석들이 벌을 서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도 친구 녀석들 옆으로 가서 벌을 서라고 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친구 녀석들이 걸레를 물린 친구에게 지속적으로 돈을 빼앗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 친구들과 어울리는 학생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불려오게 된 것이다.


억울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운동을 하느라 난 삥을 뜯을 시간은커녕 제대로 잠 잘 시간도 없었다. 무척 화가 난 선생님은 자초지종도 듣지 않고 목검으로 엉덩이를 다섯 대 씩 때리고 반성문을 쓰게 했다. 억울해서 눈물도 나지 않았던 나는 반성문에도 억울함만 토로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생님은 우리 엄마까지 소환하셨다. 엄마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고 눈물을 보이셨고, 다른 친구들을 사귈 것을 간곡히 권유하셨다. 사실 나에겐 좋은 친구들이었지만, 돈을 빼앗긴 친구가 고자질을 했다며 다시 복수할 계획을 세우는 모습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 친구들과의 사이가 멀어졌다. 시간이 지나고 나의 결백은 밝혀지고, 매를 들었던 담임 선생님의 사과까지 받았지만 여전히 난 이상한 죄책감 속에 살아가야만 했다.


친구들과의 사이가 멀어지자, 난 교실에서 은따가 되었다. 힘이 세기 때문인지, 운동부 친구들과의 교우 관계가 좋았기 때문인지 대놓고 날 괴롭히는 친구들은 없었지만, 여중이기 때문에 가능한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내 뒷담화가 끊임없이 돌았고, 나를 지칭하는 이상한 별명들이 생겼다. 이전에 내가 친구들에게 보냈던 편지는 조롱거리가 되어 교실 전체를 돌았고,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생산되었다.


그 누구도 내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Y는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내고, 나와 친해지려는 아이들에게 내 욕을 하거나 협박을 했던 친구였다. 물론 그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날 좋아해주고 지지해준 한 친구와 십 년이 넘도록 절친한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대다수의 친구들은 Y의 말을 듣고 나의 뒷담화에 동참했었다. 이제와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난 Y가 나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Y 덕분에 타인의 '시선'에 더욱 신경 쓰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아주 불행하게도 말이다.


시합에 나가 내가 딴 금메달(힘이 센 난 태권도 선수였다) 때문에 학급 친구들은 더 이상 날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Y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가 되어준 나의 절친 덕분에 전반적으로 교우관계가 좋아진 것도 큰 몫을 했다. 약 6개월 간의 은따 생활을 청산하고, 나름 행복한 중학교 시절을 보내다가 난 졸업했고 이래저래 정신없는 삶을 사느라 그때의 기억들은 특히 좋지 않은 기억들은 모두 지워버렸다.


그러다가 작년  10월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는 바람에 일주일 간 병간호를 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Y를 마주쳤다. 중학교 시절에 대한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지만  난생처음 날 '뒷담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Y를 내가 잊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썼던 편지를 친구들과 돌려 보며 '역겹고', '이중적이고', '배신자'라고 나를 조롱했던 Y를 잊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잊고 있던 기억까지 모조리 생각나버렸다. 언짢았고, 여전히 마음이 저릿했다. Y는 살갑게 내게 인사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화가 날만큼 살갑게 안부를 물었다. 덩달아 답을 해주긴 했지만 나의 표정은 분명 좋지 않았을 것이다.

Y는 한 달 뒤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10여 년 전의 일을 사과했다.  그때는 자신이 너무 어렸고, 나빴었다고. 돌이켜 생각하니 마음의 짐이 참 크더라고. 걸레를 물렸던 친구는 걸레를 물었던 친구에게 사과했고 둘은 화해를 해서 종종 만나 커피를 마신다고도 했다. Y의 사과는 둘째 치고, 걸레를 물었던 친구가 걸레를 물렸던 친구의 사과를 받아들인 것도 충격적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나에게 밀어 넣으려는 Y의 태도도 무척 불쾌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면죄부를 받고 싶어 하는 Y에게 난 끝내 '괜찮아'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내민 화해의 손길을 내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자 짜증을 내는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난 '잘 지내렴'이란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미안하다니! 이제 와서 왜 그 미안함을 토로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 묻고 싶었다.  그때 날 왜 괴롭혔는지, 내가 왜 싫었는지가 아니라 이제 와서 사과를 하는 이유를.


왕따 문제가 심각하다. 걸레를 입에 물리거나, 은따를 시키는 것은 별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겨질 만큼 어린 친구들이 자신의 친구들을 괴롭히는 방법은 날이 갈수록 더 잔인하고 난폭해진다. '괴롭힘'의 이유는 어떤 기준에서도 결코 정당할 수 없고, 합리화될 수 없다. 괴롭힘의 이유가 성립되지 않을 만큼 괴롭힘의 정도가 나날이 심해지기도 한다.


괴롭히다 보니 점점 더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하다 보니 피해자는 자신이 왜 괴롭힘을 당하는지조차 알 수 없어진다. Y와의 통화 이후 Y의 요청에 의해 우리는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다. Y는 왕따로 억울하게 죽은 사촌 동생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누군가 쓴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음대에서 벌어진 왕따 사건 피해자의 억울함을 알리는 게시글에도 좋아요를 눌렀다.


Y가 미안하다고 전화를 건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제 와서 사과하는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구' 문제로 힘들었던 6개월을 선물한 Y는 '미안한 자신'에 도취되어 있었다. 미안함에 도취된 Y에게는 미안하지만... Y의 미안함이 진심인지조차 난 알 수가 없다.


괴롭힘의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괴롭힘'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어린 친구들 이건, 사회 생활을 하는 어른이건 상대에게 '미안함'마저 표현하기 어려워질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소주를 한 잔 마신 김에 이 글을 썼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너무 없어 보이고, 마음 아프지만 굳이 '술김에라도' Y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누군가를 이유 없이 괴롭히는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알았으면 하는 한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괴롭힘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미안하다는 사과만으로는
결코 그 시간을 돌릴 수 없다.

그리고 괴롭힘을 당했던, 당하는 사람들은 "괴롭힘에는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으므로, 괴롭힘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자신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내가 Y의 만행 덕분에(?) 가장 소중한 친구를 얻었던 것처럼 누군가는 당신을 소중히 여기고, 당신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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