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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Nov 25. 2015

퇴근 선언

오늘은 진짜 '퇴근'을 하자

벌써 며칠 째 야근이다. 야근 후 동료들과 마시는 소주 한잔은 심신 안정을 위한 필수 코스다. 회의가 길어져 야근이 없는 날에는 회의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근처 술집으로 발을 옮긴다. 출근하는 순간부터 퇴근이 하고 싶었는데, 퇴근을 하고도 회사 사람들과 회사 이야기를 하며 기어이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곤 한다. 덕분에 그 날 받은 스트레스도 함께 풀고 외로움도 덜하지만 도무지 퇴근을 한 것 같지가 않다. 신데렐라도 아니고, 자정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부랴부랴 씻고 꿈나라로 떠나지만 꿈을 꿀 시간도 없이 날은 밝아온다.  


다시 출근이다. 오전 업무를 하고, 점심도 회사 사람들과 함께 먹는다. 다시 오후 업무를 하고 퇴근을 한다. 퇴근을 해도 영 시원치 않은 마음에 사람들과 술 한잔 기울이다 보면  또다시 하루가 지난다. 이런 일들이 무한  반복되고, 결국 난 며칠 째 퇴근을 하지 못한다. 퇴근을 하고도 퇴근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 간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원래 퇴근 뒤 약속도 잡고, 나만의 계획도 세웠는데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이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회사의 분위기 상 언제 회의가 잡혀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회의가 왜 퇴근시간에 맞춰 시작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유관기관에서 들어오는 긴급 요청은 늘 퇴근 전에 들어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을 타고 나서야 내가 진짜 '퇴근'을 했구나 싶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기엔 시간이 늦었고, 하루 종일 차곡차곡 쌓은 스트레스는 풀고 싶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 좋겠다 싶어 회사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술 한잔 같이 기울이며 공감해 줄 동료들이라도 있어 그나마 다행이구나 싶다가도 문득 술자리마저도 업무의 연장처럼 느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회사 사람들이  모여하는 이야기가 '회사' 이야기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퇴근 후 술 한 잔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매일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아빠의 모습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오래 마시는 게 아니라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해서 귀가하는 것이 술자리의 목표가 되었다.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잔을 기울이고, 안주가 나올  때쯤이면 이미 반 병 이상이 비워져 있다. 안주를 다 먹을  때쯤이면, 한 사람 당 한 병 정도 마시고 취기도 어느 정도 올라 집에 갈 준비를 한다. 늘 똑같은 이야기에 똑같은 패턴이라 지겹지만 함께 술을 마신 정이 있어 그런지 모두 '그러려니'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같은 자리에서 같이 술을 마시며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각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술잔은 비워지고, 아직 꿈인 듯한 아침이 찾아온다.

 

오랜만에 퇴근을 일찍해서 회사에서 지하철로 네 정거장 거리의 집까지 걸어본다. 생각보다 멀지 않다.


지난 금요일, 오랜만에 일찍 퇴근을 했다. 상사도 반차를 내서 자리에 없었고, 다들 '불금'이라며 낮부터 약속을 잡더니, 일찌감치 퇴근 준비를 했다. 매일 회사 사람들과 어울려 놀던 나는 '불금'에 아무런 약속을 잡지 않았다.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함이 아니라, 벌써 금요일이 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누군가를 만날 기분도 아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다니! 매일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하철 역에서 전력질주를 했는데, 오늘은 아주 여유롭게 걸어 지하철 역으로 갔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문득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지하철로 딱 네 정거장. 걸어볼 만 하다고 생각했다. 거리에는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 가득했고, 식당에는 불금을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그 사람들 틈에서 혼자 걷기로 결심했다.


천천히 걷다 보니 불편하고 시끄럽던 마음은 정리되고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10분은 외롭기도 하고, 공허하기도 했는데 10분이 지나니 걷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잡념도 사라지고 회사에서의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편안해졌다. 동료들과 술에 의지하며 털어내던 찝찝함이 술이 없이도 사라졌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여러모로 위로도 됐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다양한 삶이 있다. 회사 사람들과 있을 때는 회사의 구성원들이 이 사회의 전부인 것 같고, 회사 이야기를 할 때는 세상의 기준이 온통 회사에 맞춰 있었는데 밖으로 나와 혼자 걸으니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있고, 너무나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오늘은 진짜 퇴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일과 삶을 분리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이미 업무를 접고 사무실 밖을 나왔는데, 회의 시간에 상사가 했던 이야기를 곱씹는다고 해서 달라질 게 무엇이 있겠는가. 회사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매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술자리라 더욱 적나라하게 듣게 되는 회사 이야기가 과연 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오직 일에만 초점이 맞춰진 삶을 사는 것이 두렵게 느껴진다. 회사에 와서도 회사 이야기를 하고, 퇴근을 하고도 회사 이야기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것은 장기적으로나 단기적으로나 전혀 좋은 일이 아니다. 업무가 많아 야근을 하더라도 사무실을 나와서는 나를 혼자 내버려 둘 필요가 있다. 집 근처 카페에 들어가 따듯한 차 한잔을 마시며 쉬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편안한 자세로 드라마를 볼 수도 있다. 그런 삶이 무료하다면 친구들을 불러내 술 한잔 가볍게 하거나 취미 생활을 가지는 것도 좋겠다.


하나의 조직에 소속된다는 것은 개인에게 무척 큰 영향을 주는 일이다. 다른 조직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일이 내가 속한 조직에서 문제가 된다면 회사 밖의 모든 사람들이 면죄부를 준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무리 가정에서, 학교에서, 다른 조직에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도 운이 나빠 매일 얼굴을 보는 상사에게 미움을 받게 되면 누구라도 주눅이 들고, 자괴감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속한 조직에 맞게 일을 처리해가는 것, 조직에 적응해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 속의 내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를 주목해 보는 것, 한 개인의 객관적인 눈으로 내가 속한 '조직'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진짜 퇴근을 해야 한다. 단순히 사무실 밖을 나오는 물리적인 퇴근이 아니라, 마음까지 회사에서 벗어나는 완벽한 퇴근을 해야 한다.


술에 취해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회사 사람과 어울려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 때 내게 큰 위안을 주었고, 나 또한 그 시간들을 좋아했다. 어른이 되는 것 같았고, 세상을 알아가는 것 같았다. 사람들과 한층 더 가까워지는 기회를 주었고, 업무 중에 생긴 오해도 깔끔하게 풀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퇴근을 하겠다고 '퇴근 선언'을 하는 것은 단 하나의 이유다. '회사'라는, '업무'라는 거대한 괴물이 나 '자신'을 삼켜버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를 잃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퇴근을 하고도 퇴근을 하지 못해 피로만 쌓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은 진짜 퇴근을 하길 바란다. 사무실 밖을 벗어나는 물리적인 퇴근 말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줄 수 있는 완벽한 퇴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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