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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Apr 20. 2016

싸움의 이해

한껏 내 목소리를 높여 싸워야 할 이유

싸우고 싶다. 요즘 난 정말 싸우고 싶다. 속 시원하게 거친 말을 하면서 책상을 뒤엎고 싶다. 근데 누구랑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싸움'은 나쁜 것이라고 배웠다. 언니와 싸울 때면 내복 바람으로 쫓겨나기 일수였고, 초등학교 땐 반성문을 쓰거나 화장실 청소, 교실 청소를 하며 내내 말썽쟁이로 남아야 했다.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배웠다. 협력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참을 만큼 참아야 한다고 귀에 박히게 들어왔다. 어느 순간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단체 생활에 있어 잡음을 일으키는 것은 집단 구성원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난 사회의 가르침대로 싸우는 일 없이 늘 뒤에서 참아내며 하루하루를 잘 보내왔다고 생각했다. 근데 갈수록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화가 나는데 누구에게 화가 나는 건지 모르겠고, 왜 화를 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분노는 갈 곳을 잃고 결국 나를 향해 온다. 나는 잘잘못을 따질 시간도, 여력도 없이 그저 그 분노를 혼자 받아들인다. 



갈등(葛藤)
1. 칡과 등나무라는 뜻으로,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뒤얽혀 화합하지 못함의 비유
2. 서로 상치되는 견해, 처지, 이해 따위의 차이로 생기는 충돌
3. 정신 내부에서 각기 틀린 방향의 힘과 힘이 충돌하는 상태


갈등은 하나의 의견만 있을 때 발생하지 않는다. 하나 이상의 생각 또는 처지가 만날 때 발생한다. 사전적인 정의를 살펴보면 갈등의 발생은 각기 다른 수 억 명이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모든 갈등이 싸움을 의미하진 않지만, 감정이 격해져 싸움이 발생하는 것 또한 인간으로서 겪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소수 의견' 혹은 '반대 의견'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나 또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더 잘 설득하려고 노력하고, 사전에 양해를 구해 최대한 잡음을 없애고 싶어 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갈등 자체를 피곤하고 소모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회의는 길어지고 보고서에 고려해야 할 사안은 늘어난다. 내가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점점 편협해지는 스스로를 느끼며 좌절하곤 한다. 


취학 전인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질문이 많다. 왜요?라는 물음표가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닌다. 음... 그건, 음... 저건 하나씩 답 해주다 보면 대답하는 나조차도 모르는 게 어찌나 많은지 수업 후엔 녹초가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중학교 수업만 가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질문은 없고, 대답만 있다. 의견은 당연히 없고, 의사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대학교 강의실이라고 다를 건 없다. 수업 말미에 질문을 하는 친구들은 오히려 눈총을 받게 된다. '아... 저런 건 쉬는 시간에 따로 물어볼 것이지...'라는 원망과 함께 말이다. 이런 원망을 받지 않으려면 조금의 의문도 가져선 안 된다. 친구들과 다른 의견을 가져도 그저 혼자 생각할 뿐 절대 표현하지 않게 된다. 갈등이 시간과 감정을 꽤 많이 소비시킨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 우리는 타협한다. 질문하여 의문점을 풀기보다는 그러려니 이해하고 넘어가는 순간이 늘어나게 된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고,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딘 나의 친구들이 그렇다. 


너무도 싸우고 싶은 요즘, 그렇지만 어떻게, 왜 싸워야 할지 모르는 요즘, 내가 경험한 싸움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싸움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고, 싸움은 생각보다 해 볼만한 일이다.  




1. 이유 없는 싸움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할아버지 선생님이었다. 손주 녀석이 내 짝꿍이었고, 우린 자주 책상에 선을 그어가며 '넘어오면 내 것!' 전쟁을 벌이던 '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기억한다. 당시엔 요즘 세상에선 절대 벌어질 수 없는 일이 일상처럼 일어나곤 했다. 선생님은 받아쓰기를 틀릴 때마다 발바닥을 한 대 씩 때렸고, 남자아이들의 바지에 손을 넣어 장단지를 꼬집곤 하셨다. 음악 시간엔 낡은 아코디언을 꺼내 트로트를 연주하셨고, 반장이나 부반장(나였다)을 불러 노래를 시키셨다. 무엇보다 독특한 선생님의 취미는 아이들을 '싸우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반장과 부반장을, 키 큰 아이와 작은 아이를, 전학 온 애와 말썽꾸러기 아이들에게 싸움을 권하셨다. 다시 생각해도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선생님은 책상을 다 뒤로 밀라고 하셨다. 싸움에 불리한 아이들은 선생님 책상 속으로 숨겨주시기도 했다. 아이들은 싸웠고, 싸움은 과격해졌다. 필기구 던지기부터 시작해서, 의자 던지기, 책상 뒤엎기 등으로 싸움에 동원되는 물품의 크기가 커졌고, 선생님의 책상 밑으로 숨는 아이는 패배자가 되었다. 싸움의 기회는 언제나 있었다. 선생님은 아주 작은 갈등도 놓치지 않고 싸움을 붙이곤 하셨다. 신기하게도 싸움의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싸우던 아이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 반장 녀석과 나의 싸움은 화이트데이에 녀석이 내게 준 사탕 때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싸움. 녀석이 정말 예쁘게 포장한 사탕 다발을 나에게 주는 바람에 온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다. 너무 창피해서 울음을 터뜨렸고, 선생님은 놓치지 않고 싸울 기회를 주셨다. 난 꽤 과감한 아이였고, 싫지 않은 반장 녀석의 몸에 주먹을 날리기보다 나만큼 무거운 책상을 높이 드는 편을 택했다. 책상을 들기도 전에 반장 녀석은 선생님의 책상 밑으로 숨었다. 싸움은 1분도 되지 않아 끝났고, 그 날 우리는 둘이 남아 선생님의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비 내리는 호남선'을 두 어번 부르고 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반 아이들은 '싸운다'는 것에 무뎌지는 듯했다. 과격의 정점을 찍던 싸움은 재미없는 놀이가 되었다. 선생님은 분명 아쉬워하셨지만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이유 없는 싸움은 사람들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는 걸 배웠다. 그래서 '전쟁'에는 늘 명분이 필요하고, 전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명분이든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이라는 역사의 기록 또한 납득할 수 있었다. 


2. 싸우기는 꽤 어렵다 

싸우려면 상대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이가 들수록 싸움의 상대를 찾는 건 어렵다. '좋게 좋게' 넘어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웬만한 일로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 혹은 '나'는 싸웠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봐도 싸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미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위계적으로 싸우기도 전에 승패가 결정 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와 비등비등할 경우, 싸움은 진정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것이 주먹이든 두뇌든 사업이든 한쪽으로 기우는 상대와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간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싸움을 이어간다면 우리는 '반전'을 기대하곤 한다. 당연하지 않은 싸움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 정도로 '싸움'은 어렵다. 어쩌면 '나'라는 상대가 확실히 있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설상가상 이 어려운 싸움이 우리 사회에선 '부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태권도를 하다 보면 싸움(이라기엔 좀 그렇지만)은 상대방을 알아가는 방법 중 하나이며, 나름의 예의가 존재한다. 바둑도 마찬가지로 규칙 안에서 상대방의 수를 읽고 나의 수를 펼치는 일종의 싸움이다. 이런 스포츠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도 우린 싸울 기회가 필요하다. 나의 의견을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내가 화를 내야 할 상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연습을 하지 않고는 우리는 그 어떤 싸움의 기회도 얻을 수 없다. 묻지 마 폭행, 살인처럼 화를 낼 상대를 잘못 선택한 경우는 '싸움'으로 인정하기가 어렵다. 싸우는 이유, 대상, 그 방법이 명확하게 인식될 때 우리는 제대로 된 싸움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진정 '싸움'을 했다기보다 어떤 방식으로든 감정을 표출할 행위들을 이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3. 싸움의 이해 

내 연애 로망은 '사랑싸움'이다. 이전 연애에서 난 싸움을 한 적이 없다. 내가 감정을 소모할 만큼 사랑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고, 싸움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싸운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고, 싸움은 곧 헤어짐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싸우진 않았지만, 갈등마저 막을 순 없었다. 꾸욱 눌러 담았던 불만들은 그저 헤어짐으로 해소되었다. 싸움을 통해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보다 더 큰 에너지를 '헤어짐'의 과정에 쏟아냈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난 '싸울 수 있는 사람'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싶어 졌다. 화를 낼 이유와 그 화를 터뜨릴 기막힌 타이밍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싸움'에 대한 지극히 부정적인 편견이 있는 것 같다. 갈등이 발생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타인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거나, 새로운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회는 개인을 외면해왔다.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에도 갈등은 발생하기 마련이듯 이 거대한 사회 속을 살아가는 구성원들에게 다름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현실이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갈등을 제대로 분출할 '싸움'을 할 필요가 있다. 나의 분노가 무엇으로부터 발생했는지, 이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어떻게 싸울 것인지, 그리고 이 싸움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생각해 볼 여유가 필요하며 무조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선택'에 의해 제대로 된 싸움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신뢰가 필요한 것이다. 분노의 방향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고, 분노의 정도를 조절할 연습이 필요하며, 싸움 후에 상대와의 갈등을 풀고 화해할 수 있는 예의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싸우고 싶다는 막연한 감정을 시작으로 싸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싸움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친구와의 싸움이 나의 우주를 흔들만큼 큰 일이었고,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조금씩 변해왔던 것 같다. 반성을 하거나 '나' 자신에 대해 더 알아가거나 혹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몸소 깨닫곤 했다. 어려서부터 난 '싸우면 안 된다'고 배웠지만, 어른이 될수록 싸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내 안에 느껴지는 모든 분노의 화살을 스스로에게 겨눌 만큼 어리석어질 때 우리는 정말 괜찮은 '싸움'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누구에게 왜 얼마나 화를 내어야 이 싸움의 끝이 가장 평화로 울지를 생각하는 연습이야말로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이 아닐까 싶다.


내일은 좀 더 괜찮은 싸움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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