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크노크 Apr 28. 2016

외할머니의 옷장

흐린 기억 속의 그대에게

누구에게나 '아픈 말'이 있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갑자기 마음을 저릿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말. 죄책감이라든가 우울함 혹은 분노가 뒤섞였지만 쉽게 그 감정을 꺼내기 어렵게 만드는 단어. 그 단어가 내겐 '외할머니'다. 아마 울 엄마도, 울 언니도 그 단어는 아플 것이다. 여전히 아프고, 앞으로도 계속 아플 단어. 그래서 견딜만한 단어.



거의 3년째, 봄이 되면 내가 교복처럼 자주 입고 다니는 옷이 세 개 있다. 카라 디자인이 독특한 분홍 블라우스, 무릎을 딱 덮는 초록 스커트 그리고 투버튼 남색 재킷이 바로 그것이다. 트렌디하진 않지만 촌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세련된' 느낌의 옷들이다. 친구들은 특히 카라 디자인이 독특한 분홍 블라우스와 무릎길이의 정갈한 초록 스커트를 어디서 구매했는지 궁금해했다. 그때마다 난 일부러 큰 목소리로 "몰라, 이거 사실... 우리 외할머니 옷이야. 한 15년 정도 전에 사셨을 걸?"이라고 대답한다. 그럼 친구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도 안 돼! 이 옷이?"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양장점 이름 혹은 알 수 없는 이름이 적힌 옷의 태그를 보여주면 그제야 끄덕이며 외할머니의 패션 센스에 감탄하기 시작한다. 바로 요 포인트 때문에 난 늘 이 옷들을 입는지도 모르겠다.


외할머니는 요즘 말로 '패피(패션피플)'다. 바뀌는 계절마다 옷 한 벌은 꼭 '맞춰' 입으셨고, 외출할 땐 정성 들여 화장을 하고 굽 있는 구두를 신으셨다. 잘 다듬어진 손톱에는 늘 투명 매니큐어가 반짝였고, 가방이나 액세서리에도 신경을 쓰셨다. 제 때 염색을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으셨고, 양말보다는 살색 스타킹을 즐겨 신으셨다.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셔서 병원에 실려가시면서도 신발장에서 굽 있는 구두를 챙기시는 걸 보고 우리 가족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일흔네 살의 외할머니는 병원에서도 수시로 머리를 빗고 거울을 보며 병원복 매무새를 다듬곤 하셨다. 그런 외할머니를 보며 우리는 늘 안도하곤 했다. 그것이 건강함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난 유독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함께 산 기간도 길었고, 맞벌이 부모님 대신 외할머니 손길을 더 많이 받으며 자랐지만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 없다. 불리한 기억을 쉽게 잊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지만, 이다지도 홀라당 기억이 사라진 건 허무한 일이다. 그럼에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내가 참 외할머니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외할머니는 예민한 분이셨고 다혈질이셨다. 어린 내게 그녀는 세상 모든 욕을 섭렵하여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마녀였고, 동화 속에 나오는 계모와 같았다.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친구들은 늘 우리 외할머니의 우아하고 지적인 외모, 상냥한 웃음을 부러워했다.


외할머니와의 동거는 어린 내게 두 가지 진리를 깨닫게 만들었다. 하나는 사위, 장모가 한 집에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또 하나는 할머니들이 손주를 봐주는 이유는 손주가 예뻐서라기 보다 자기 자식이 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진리와 같은 사실 말이다. 외할머니는 늘 나와 언니에게 욕을 했고, 아빠의 흉도 많이 봤다. 때마침 IMF라는 거대한 괴물이 부모님을 힘들게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IMF를 파이내플이라 읽으시는 외할머니 때문에 늘 힘든 시간을 보냈다. 엄마에게 도시락을 배달해 주는 시간이 외할머니에게 벗어나는 기막히게 좋은 기회였는데 이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외할머니는 늘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주곤 했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다방 언니들이 참 많았다. 친구 녀석들이 분홍 보자기를 든 내게 다방 언니라고 놀렸을 때 내가 받은 창피함은 여전히 내 얼굴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다.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외할머니는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셨고, 혼자 사는 삶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이후 외할머니는 독립을 선언하셨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우린 서로 꽤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트러블 메이커인 외할머니는 늘 그렇게 혼자 살고 싶어 하셨다.  서로 다른 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던 평화기는 지나고 그녀와 다시 함께 살게 된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나와 언니 그리고 동생은 예전처럼 어리지 않았다. 악에 바쳐 생떼를 부리기보다 분란을 없애기 위해 애써 그녀가 건 시비를 무시하곤 했다. 그리고 점점 더 무심해졌다. 외할머니는 스모커였고, 종종 술에 취해 계셨다. 하지만 워낙 동안에 정정한 편이라 우린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나의 경우 나의 세계에 빠져 바깥으로 나돌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았다. 여느 드라마처럼 우리는 치매를 의심하며 걱정하고, 화투, 윷놀이 등 다양한 홈케어 프로그램을 시행해봤지만 결국 외할머니는 약국에서 사다드신 많은 양의 수면제 부작용과 치매 증상이 함께 와 병원신세를 지고 마셨다. 맞벌이 부모님과 이미 성인이 다 되어 타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는 두 손녀와 초등학생인 손주는 외할머니를 볼 수 없었다. 치매센터를 알아보면서 엄마는 매일 밤을 우셨다. 그런 엄마를 보며 나와 언니도 매일 마음 아팠다. 미움은 여전하지만, 그 미움에서 자라난 사랑이 무섭게 감정을 집어삼켰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우울증을 앓았다. 다행스럽게 정말 좋고 유명한 치매센터에 들어가시게 되어 한숨을 돌렸다. 전문 치료인들이 있어 그런지 갈 때마다 호전되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안도했다. 그럼에도 늘 아팠다.


슬프게도 치매는 외할머니에게 옷을 골라 입어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앗아갔다. 우리는 외할머니 옷 중에 예쁜 옷만 골라 계절마다 센터에 가져갔지만 입고 나오시는 건 늘 다른 옷이었다. 외할머니 옷은 다른 사람이 손도 못 대게 하시고 본인은 타인의 옷을 입겠다고 고집부리신다고 했다. 우린 외할머니의 옷을 그대로 들고 와 옷장에 넣었다. 엄마의 권유로 옷장 정리를 하면서 외할머니 옷을 몇 벌 입었는데 내 몸에 꼭 맞춘 듯 예뻤다. 그래서 그 옷은 내 옷이 되었다.



외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면 난 외할머니의 옷을 입었다. 외할머니는 몇 번이고 옷 매무새를 다듬어주며 예쁜 옷을 입었다고, 앞으로도 이런 예쁜 옷만 입어야 한다고 했다. 나와 언니가 웃으며 "이 옷, 할머니 옷이야."라고 하자, "얼레!" 놀란 표정을 하며 믿지 못하셨다. 10분이 지나고 상황은 반복되었다. 그래도 난 외할머니를 만나러 갈 땐 되도록 외할머니의 옷을 입는다. '예쁘다'고 말해 주시는 것이 좋다. 흐려진 기억 속에 사시면서 여전히 뚜렷한 취향을 유지하시는 걸 보며 안도하게 된다.외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은 여전히 아프고, 함께하지 못하는 시간 또한 아프다.


다 커서야 알게 된 외할머니의 인생사 때문이기도 하고, 외할머니의 유일한 보호자가 우리 가족이라는 책임이 우리의 연대를 더 강하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무 살 무렵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꽤 오래 울었다.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이 흐려진 외할머니의 기억을 세상 밖으로 꺼내드리고 싶다. 오늘도 외할머니의 옷장에서 꺼낸 투버튼 남색 재킷을 입고 출근을 한다. 아픈 단어라서 아프지 않게 일상을 견디게 하는 외할머니를 다음 주엔 만나러 간다. 아직 나의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하시는 외할머니를.






매거진의 이전글 싸움의 이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