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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Sep 03. 2023

바람

 네가 내 처음을 주었던 날, 2평짜리 우주에서 샛별처럼 빛났던 얼굴을 기억해.

그즈음엔 이슥한 밤에도 눈을 감으면 햇살이 비추는 듯했어. 다시 떴을 때는 손 닿는 거리에 네가 있길 바라고.

네게 말해주었더니 너는 그게 뭐냐며 쑥스럽게 웃었어. 그때부터 나는 글을 잘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 

햇빛 쨍한 날이면 너는 크림색 니트를 입고 생크림을 얹은 토스트를 먹으러 가고 싶어 했어. 포실거리는 먼지 사이로, 맞잡은 손을 휘휘 저으며 너는 오늘 딸기빙수를 먹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지. 그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웃음이 나서 아무래도 좋은데도 자꾸만 아니라고, 초콜릿 빙수가 더 맛있다고 장난을 쳤어. 가게 앞에 다다라서 나는 장난을 그만두었고  네 의기양양한 표정은 그럼 그렇지라고 말하는 듯했어. 

선생님 몰래 교문을 빠져나온 밤에는 너의 등굣길을 따라 수 놓인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 소리에 몸달아 했어. 정문에 다다라 황금색 밀밭을 닮은 나무 아래서 서성이고 있으면 얄따란 발소리가 들리고, “아이, 오지 말라니까”라는 말 뒤에 우리는 어둠을 틈타 더운 숨을 몰아쉬었지.

네 손에는 항상 팔레트와 붓이 들려있었어. 그걸로 내 몸에 그림을 그려주었잖아. 어느 날은 연분홍 벚꽃을, 또 어느 날은 파도치는 시린 빛깔 바다를, 해가 저물 무렵에는 숨결처럼 하얀 눈송이를. 참다못한 네가 붓을 내동댕이치고 간 날에는 내가 그것들을 주워들어 심장에 검은 먹구름을 그려 넣곤 했어. 내 몸 어디도 네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즈음 나는 네 첫 번째 작품이 된 거야.

우린 어디에 있든 늘 벼랑 가까이에 있었어. 허락된 한 뼘의 시간이 지나면 널 마왕에게 돌려보내야만 했고, 매일 밤 춥고 어두운 동굴을 홀로 내려가는 널 멀찍이서 가슴 졸이며 지켜봤어. 어느 날은 그 모습이 못내 안타까워서 내일 헤어질 땐 잘게 부순 햇살을 네게 쥐여주고 싶었어.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글을 써. 이제야 감정 낭비라는 말이 이해가 가. 내가 얼마나 큰 행복을 누리겠다고 스트레스받아가며 머리 굴려서 듣기 좋은 말을 짜내고, 보기 좋은 행동을 척하려 드는 건지. 없는 마음 만들어내고 없는 생각 집어넣으려고 무슨 난리를 치는 건지. 옛날이면 신나고 흥분할 거리도 지금 와 애써서 하려니 짜증스럽기만 해. 그땐 어떻게 했던 걸까? 그땐 왜 그렇게 재미있던 걸까? 낭비하기 싫어. 내 생각과 마음을 오롯이 나를 위해서만 쓰고 싶어. 아름답고 우아한 것만 쓰고 또 보고 싶어. 

한때 기계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 기복이 심하고 나약한 나를 누구에게든 상처 입지 않고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 지금은 그게 아니란 걸 알아. 난 그럴 수 없는 사람이야. 그만 일어나야겠어.

천자 남짓한 글을 쓰면서 네가 있었던 시절을 많이 생각했어. 좋더라. 더 이상 네가 그립지는 않지만, 이번 기회에 그때를 정리하고 한 폭의 그림으로 걸어놓을 수 있어서 홀가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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