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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Sep 23. 2023

나의 작가일지

 글은 쓰는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다. 외면을 그대로 드러낼 때도 있고 감추어둔 내면이 글 안에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기도 하다. 시나 소설부터 에세이, 칼럼 어떤 것을 쓰든 상관 없다. 심지어 글을 잘 쓰는지 못 쓰는지도 상관이 없다. 그 안에는 자기 자신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내 글은 시와 노래를 가장 많이 닮았다. 그중에서도 봄과 여름, 꽃과 나비 그리고 빛과 바람 같은 아름다운 소재를 가져다 쓰기 좋아하고 낭만적인 배경에서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미술 사조로 비유하면 고전주의 두 스푼에 인상파 한 스푼을 섞은 느낌이다.  


 나는 글쓰기와 합평을 위한 모임에 자주 참여했는데 그러면서 남의 글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특히 첫 모임 때는 한 달마다 소설을 써서 합평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내 글은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줄거리보다는 원자 단위의 단어나 문장 하나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술을 마신다고 하면 그 술이 어떤 술인지, 병이 어떤 디자인인지에 대해 디테일하게 적으려고 했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극사실주의적으로 접근한 것이고 아니면 상정하는 독자들이 별로 관심이 없을 부분에 과도하게 신경을 쏟는 바람에 전체적인 분위기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합평을 거듭하면 할수록 그런 종류의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뮤직 비디오 같다,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장면이 그려진다와 같이 장점을 더 살려서 말하는 식이었고 일부가 서사적인 부분에 더 집중하면 어떨지 권유했다.

 처음에는 내 스타일이 잘못되었는지 해서 바꿔보려고 애썼다. 서사에 더 집중하기 위해 글을 쓰기 전에 노트에 줄거리를 쓰고, 그것들을 기승전결에 맞게 잘라 이야기에 빈틈이 없는지 보았다. 또 인물들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리기 위해서도 애썼다. 좋은 점은 그렇게 노트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워 쓰고 나면 마치 글을 완성한 것처럼 뿌듯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놓고서도 지적된 부분은 고쳐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작은 디테일에 집착하고 견딜 수 없어했다.


그것 때문인지 한동안은 글쓰기에 흥미를 잃고 다른 것들에 몰두했다. 외국어를 배워보기도 하고, 미술사를 공부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다시 글을 잡게 되었는데, 그것은 주말에 불쑥 강원도 춘천의 어느 시골로 여행을 떠나고 나서였다. 나는 시골 풍경에 대해 막연한 선망이 있었으므로 한적하고 평온한 길을 걸으며 정취를 느끼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걸으며, 어두워지는 하늘에 점점이 박힌 별을 보며 문득 이것들을 모두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기와 바람을, 낡은 학교 건물과 솟아오른 깃대를, 그리고 갈색 벽돌로 쌓은 담장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장르로 글을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일 잘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우선 너무 길면 안 되었다. 능력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작은 것에 집중하고 함축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에 글이 길면 길수록 들어가는 에너지가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서사를 늘어놓기보다는 생동감 있고 강렬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좋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시였지만 시가 쓰고 싶지는 않았다. 문장의 길이가 너무 짧았고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데다가, 무엇보다 시 읽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문장을 보아도 항상 확실하게 이해한 뒤에 다음으로 넘어갔는데 시는 얼마를 보아도 이해되기는 커녕 머리만 아파지곤 했다. 고민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서점에서 책을 보다 분홍색 단색으로 된 책이 눈에 띄었다. 제목과 그 아래 적힌 독어가 또 얼마간 시선을 붙잡았다. 결국 ‘몇 페이지 볼까?’ 란 생각으로 책을 펼쳤다. 아, 안에 적힌 글들은 순식간에 내 세계를 부쉈고 다시 구축했다. 형식이 뭐가 중요한가. 내가 쓰고 싶은 만큼, 쓰고 싶은 내용을 내 리듬에 맞춰 쓰면 되는 것 아닐까? 그 작가는 지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다.


 글을 쓰는 일이 제일 재미있는 일이 되었다. 어떤 것을 시작해도 오래 집중을 못하거나 귀찮아하는 내게 글쓰기만큼은 돌고 돌아도 마침내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을 보면 내 천직이다. 종로 한복판을 걸으며 햇빛에 비친 건물들의 위용에 감탄하고 한여름 무성하게 자란 가로수를 보며 도시를 내려다보는 수호신 같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들을 메모장에 적어두었다가 글로 써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작가라는 직업에는 늦고 빠르고가 없다지만 이 나이에도 글을 쓸 운명을 안 것이 다행스럽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다. 목적성 없는 삶과 일시적인 것을 좇는 생활은 쉽게 지치기 때문이다. 이 길이 끝 어디로 이어져 있을지는 모르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오늘도 한자 한자 써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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