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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Sep 03. 2023

그런 날

knokno

파주에 간 날이었다.

추석 전날이어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고 가게는 대부분 문을 닫았다. 바람과 새소리만 남은 정적을 거닐다 문득 눈길을 잡아끄는 게 있었다. 3층 높이에 통창문이 달린 방이었는데, 올려다보고 나서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방 안 커튼이 나풀거렸다. 이어서 네가 커튼을 활짝 걷고 고개를 내밀 것 같았다. 익숙한 그 얼굴로 살포시 보조개를 그려 웃으며 내려다볼 것 같았다. 그리고 주위를 도리반대다 검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켜 계단이 있다고, 얼른 이리로 올라오라고 발간 입술을 오물거릴 것 같았다. 그 위로 햇살은 명랑하게 쏟아지고 창에 부딪혀 산산이 아스러진 오색 빛깔들이 아래로 아래로, 눈 위로 켜켜이 쌓였다.

만약 우리가 함께 이 건물을 보았다면 너는 어떤 말을 했을까? 금방 생각해 낸 문장들이 네 목소리로 숨 쉬고 있었다. “참 예쁘다! 구조가 신기해. 봐봐, 두 건물을 합쳐놓은 것 같아. 저기 3층 방은 있잖아, 저기로 가려면 오른쪽 현관으로 들어가서 올라가야 하는 건가?” 라거나 “오빠는 지금 사는 집 대신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 난 너무 좋을 것 같아. 교통은 불편하고 사람들도 바글거리겠지만. 저 방에서 쩌-기까지 보는 풍경이 어떨까 궁금해. 그리고 밤에는 와인 까고.” 그리고 우리는 혹여 이 근사한 장소의 발 끄트머리에라도 닿아 있으면 상상했던 정경을 느낄 수 있을까 해서 계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수다를 떨었을 것이었다.


“서울 아무 곳이나 딱 한 군데에서 살 수 있으면 어디가 좋을 것 같아요?” 첫날 네가 건넨 물음 하나가 너를 좋아한 첫 번째 이유가 되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것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끌어안고 있게 했고 네게 끌리는 내 안의 무언가에 대해 탐구하게 했다. 너는 올려다본 하늘에, 등을 기댄 의자에, 함께 들은 음악에, 들판에 핀 꽃 향기에 대해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단편적인 단어들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행여 무심코 내뱉은 말의 길이와 가벼움으로 나를 판단할까 봐. 섬세하게 살피고 모난 곳을 매만져 둥글둥글하게 만들고 나서야 입을 열곤 했다. 그것은 단 십 분만에 끝나기도 하루가 넘게 걸리기도 했다. “그때 물어봤던 거 있잖아.”라고 말을 꺼내면 너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었다. 말이 느린 내가 입을 열기까지 너는 내 손을 단단히 붙잡고 기다렸다. 그것은 마치 영원히 네 곁을 지키고 바라보겠다는 심지 굳은 선언인 것만 같았다. 

그랬던 만큼 얼마 동안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이 내게 가혹했다. 나는 어느새 사회 안의 다양성이나 포용성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모든 사람이 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종종 남에게 멋대로 씌운 가면이 벗겨지면 폐부를 깊숙이 찔린 것처럼 그만 숨이 멎고 생각을 잃어버리곤 했다.

마침내 터널 같은 시간들을 벗어난 뒤에도 네가 남긴 흔적들은 무해한 형태로 여전히 몸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다. 연고를 잘 발라 언뜻 안 보이는 상처도 곪아 터져 괴상한 모양을 한 흉터도 있다. 립스틱처럼 새빨간 자국도 비가 내리기 직전의 구름을 닮은 희뿌연 자국도 있다. 반쪽짜리 세계에 네가 밀물처럼 닥쳐 들었을 땐 몰랐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서야 절반의 빈 세계에서 발견한 조개껍질 같은 그것들은 나를 더 지혜롭고 다채로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따금 삶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나는 그것들을 천천히 쓰다듬곤 했고 그러면 조금 안심이 되었다. 


시곗바늘을 휘 돌려, 새벽 찬바람 맞으며 언젠가 함께 보았던 쪽빛 캔버스 위 구름 무리를 마주 본다. 그날은 버스 안에서 내내 설렘에 몸 달아하기도 했다. 핸드폰을 켰다 말없는 널 보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바깥 풍경이 생경해 넋을 잃고 쳐다보다 알림음에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보면 허튼 광고 메시지가 눈을 비껴가고. 하릴없이 켠 지도 앱에서 남은 거리를 줄여도 보고 늘여도 보고. 그러다 열린 문 사이로 네가 보이면 혹여 바람처럼 사라질까 달려가 품에 안았던, 그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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