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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Sep 23. 2023

과거로부터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유일하게 정적을 메웠다. 팔을 들어 본 시계에 떠오른 숫자가 물결치며 세상은 아직 정상이라고 알려주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침착하자. 그곳에 가서 버튼을 누르면 되는 거야.’ 생각이 정리되자 단번에 도로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xx중학교로 가주세요. 점잖게 대답하신 기사님은 네비게이션에 학교 이름을 검색했다.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지나치는 모든 차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상상이 떠올랐다. 저 차가 갑자기 미쳐서 이쪽으로 들이박으면 어쩌나. 심지어 반대편 차로에 있는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부딪힐까봐 시트에 바짝 등을 붙이고 있었다. 공포는 배달기사가 탄 듯한 오토바이가 옆 차로에서 경주하듯 달릴 때 극에 달했다. 

 다행히 택시는 목적지 앞까지 안전하게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교문 너머에 있는 학교를 바라보았다. 낯익은 건물 꼭대기에 잘 익은 노른자 같은 해가 걸려있었다. 지워진 듯했던 옛날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교실에서 친구들과 아무 걱정 없이 수다를 떨던, 사람들이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주었던, 그리고 아무런 잘못도 실수도 하지 않았던 그때.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돌아가 이제껏 저질렀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하려고 마음먹은 일은 최선을 다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따뜻하게 대할 것이다. 돌아가기만 한다면.


어느새 현관을 지나쳐 눈앞에 익숙한 복도길이 펼쳐졌다. 여기에서 계단을 타고 한 층을 내려가면 내가 있었던 교실이 나왔다. 그 안 어딘가에 버튼이 있을 것이다. 계단을 향하는 동안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고 계단을 다 내려올 즈음에는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학년반이 쓰인 팻말을 보자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썼던 교실은 이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었다. 벌벌 떠는 손으로 뒷문을 잡고 흔들었다. 다행히 잠겨있지 않았고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 안은 기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교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책상과 의자가 깨끗했다. 뒤쪽 구석에 서있던 에어컨은 대신 천장에 달려 있었다. 분필 가루가 날리던 칠판도 화이트 보드로 바뀌었다. 나는 책상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버튼이 어디에 있을지 생각했다. 내가 앉았던 자리에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이 들자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았다. 첫 번째로 앉았던 자리, 없었다. 학기가 바뀌기 전 두 번째로 앉았던 자리, 여기도 없었다. 2학기로 접어들어 다시 자리를 바꿨다. 자리를 정하기 전에 선생님은 같이 앉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쑥스러운 분위기와 서로 눈치를 보는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손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말하고 그 뒤에 우리가 앉았던 곳은... 하지만 책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잠시 머리가 멈춰서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손을 책상 서랍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아주 차갑고 미끄러웠다. 분명히 버튼이었다. 심장이 다시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몸 안의 모든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동시에 불안감이 독가스처럼 몸 안에 퍼졌다. 나는 다시 숨을 내쉬고 버튼에 손을 갖다댔다. 그리고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뒷문이 벌컥 열렸다.

“가지마!”

등골에 오싹함이 흝고 지나갔다. 뒤를 돌아보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얼굴이 벌게져 있고 숨이 거칠었다. 그는 다시 말했다. “가지마. 난 네가 필요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어. 더이상 이곳에서 살고 싶지가 않아. 나한테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난 너무 많이 실수했어. 셀 수 없을 정도야. 이젠 날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아무한테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아. 그렇다고 그동안 제대로 해낸 것도 없지. 이제 날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속에 있던 것을 쏟아내다 점점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난 그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싶었다.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가서 웃을 수 있는.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멍청하게 굴었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내가 상처를 받았다. 손을 건넨 사람을 뿌리치기도 했다. 내 안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적도 많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십몇 년을 살았고, 그렇게 해서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렇게 많은 실수를 했는데도 지금도 완전히 고쳐진 게 아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내가 아니야. 이따위로 더 살라니 차라리 죽을 거야.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버튼에 갖다댄 손을 강하게 눌렀다.

그 순간 쿵! 하고 멀리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여파가 여기까지 전해져 바닥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겁먹은 얼굴로 교실 안으로 들어와 벽을 붙잡았다.

”난 포기 못 해. 넌 이제껏 고생했던 게 아쉽지도 않아? 그동안 우리 잘 헤쳐왔잖아. 거의 다 왔어. 실수하고 또 실수하고 또 실수했는데도 우린 지금도 아직 잘 서있잖아. 왜 널 과소평가하는 거야? 우리 행복해질 수 있어. 난 우릴 믿어. 우리가 온 길이 절대 잘못되지 않았다고 믿어. 결국은 알아주는 사람들이 모일 거라고.“

진동은 더욱 더 강해졌고 이제 서있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천장에서 모래와 작은 돌맹이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웅크리듯이 의자에 걸터앉아 버튼을 꼭 누른 채로 책상을 끌어안았다. 그는 넘어질 것처럼 기우뚱하면서도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행복? 이정도 했으면 됐어. 그렇게 고생했어도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잖아.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고. 난 내게 왔던 기회를 다 걷어차버린 거야. 빌어먹을 성격이든 행동거지 때문에. 이제 누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주겠어?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 거야.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후회했던 걸 다시 선택할 거야.”

말을 하고 나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틀림없이 그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슬프겠지. 내가 당신을 슬픔 남짓한 걸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데. 하지만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굴 전체에 환희가 가득했다. 떨어지는 돌멩이도 그가 걸어오는 쪽을 피해 쏟아졌다. 진동은 이제 마치 지진처럼 흔들렸지만 그는 마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이 올곧게 서서 걸었다.

“그렇지 않아. 네가 한 게 뭐가 없어. 지금 네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건 잘 살아왔기 때문 아니야? 네 선택들이 때론 안좋은 쪽으로 흘러가기도 했지만, 난 틀림없이 그것들도 점점 쌓여서 네게 선물이 될 거야. 우린 잘 될거야. 그럴 수밖에 없어. 가장 가까이서 널 본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는 어느새 눈앞에 있었다. 등 뒤로 학교 건물이 무너지고 있는 장면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보였다.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지나갔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것이었다. 후회로 남을 선택을 하기 전, 행복했던 순간들.

“우리 조금만 더 가보자. 난 너무 기대돼. 이렇게 힘든 시기를 버텨냈는데 앞으로 얼마나 기쁜 일이 많을지, 그리고 얼마나 행복할지 가늠이 안 돼. 난 너와 함께 그 순간을 보고 느끼고 싶어.”


그의 손끝이 내게 닿는 순간, 피부를 타고 흘러들어온 전기가 온몸을 적셨다. 나도 모르게 버튼을 누르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붕괴가 멈췄다. 마치 시간이 되감기는 것처럼 떨어지던 돌조각이 도로 올라가 붙었다. 나는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는 나와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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