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이었어, 널 처음 본 건. 내 방 깊숙한 구석, 수납장 속 꽂다 만 책들 사이에서.
밤늦게 돌아와 방문을 열고 불을 켜려는 순간 그곳에서 빛나는 호박색 눈을 봤어. 아스라한 안갯속에서 말간 빛을 내던 너, 결을 따라 발밑으로 퍼져나가는 온화한 색들의 그러데이션. 깜짝 놀란 나는 스위치를 눌렀고 방은 차가운 형광등 빛으로 가득 찼어. 다시 그곳을 쳐다보았을 땐 너는 온데간데없었고 남은 건 바닥에 점점이 찍힌 발자국뿐. 나는 잘못 본 것이라고 머리를 흔들면서도 그 찬란한 호박 빛깔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어.
그 사이 나는 사진이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어. 카메라를 목에 걸고 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가 무지개를 담곤 했지. 한편을 차지한 책더미가 쓰러질라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가면 내 키보다 더 큰 앰프가 나를 굽어보고 있었고, 앰프에서 흘러나온 노랫소리는 그것보다 더 높이 솟은 천장을 타고 넘실거렸어.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을 대면 돌 부스러기가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콘크리트 벽, 다이얼을 돌리면 서울 사투리로 ‘별이 빛나는 밤에’ 가 나올 것 같은 축음기, 날아든 벚꽃 무리가 잠시 머물다 가는 연못 하나하나 정성껏 사진으로 남겼어.
카메라 용량을 꽉 채워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 언제나처럼 방문을 열고 불을 켰는데 스위치 옆으로 벽지가 길게 갈라져서 흉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거야. 나는 허겁지겁 테이프를 가지고 입을 막았고, 그러다 그 끝에 마주 닿아 있던 서랍장을 얼핏 보게 됐어. 책 사이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검고 긴 털. 그건 아주 선명한 검은색을 띠고 있었고 윤기가 흘렀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내 방의 온도가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건.
또 어느 날은 초록빛 바탕에 금빛 고풍스러운 글씨를 읽었어. ‘오만과 편견’, 꾀꼬리의 꽁지털을 닮은 책갈피를 제일 좋아하는 장면에 꽂아두고 책장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놓았어.
거실 소파 위에는 액자를 걸어놓았어. 점점이 구름이 뜬 화창한 날 강가를 그린 그림을 말이야. 봄을 알리는 전령처럼 뛰노는 아이들, 부인들에게 정중하게 뱃놀이를 제안하는 신사를 봤어. 그리고 남자의 말에 불어오는 따사로운 햇살과 바람, 촘촘하게 짠 벨벳 같이 푹신한 땅의 감촉을 느끼며 그 여인의 감정을 속으로 상상해 보았어. 그날 밤 무도회에서 두 손을 맞잡고 출 춤까지도.
밤늦게 야근을 하고 돌아온 날이었어. 피곤에 절은 채 머릿속에는 샤워하고 쓰러질 생각밖에 없었어.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바닥에 점점이 찍힌 발자국이 눈에 들어온 거야. 그걸 보자마자 바로 너란 걸 알았고, 순간 눈은 휘둥그레지고 졸음이 확 달아나버렸지. 허둥지둥 신발을 벗고 발자국을 따라 뛰듯이 걸어갔어. 발자국이 내 방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본 순간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속으로 아닌 척, 아닐 거야라고 중얼거렸어. 방문 손잡이를 너무 세게 쥐고 돌리는 바람에 문도 덜컥 덜컥 숨 막히는 소리를 냈어.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린 순간, 칠흑 같은 한밤 속에서 네가 빛나고 있었어. 언제인지도 모를 그때의, 너무나도 호박색 빛깔이 천장에 달린 유리 샹들리에의 가장자리를 따라 흘러넘치고 있었어.
아침에 일어나면 커튼의 매듭과 매듭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반갑게 맞아주었어. 내가 일어난 걸 알았는지 거실에서는 귀가 뻥 뚫릴 듯한 청량한 시티팝이 들려와. 이불을 힘껏 걷어차고 거실로 나가 볼륨을 더욱 올렸어. 오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지. 또다시 해 뜨는 날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껴.
욕실을 나오니까 총총 걸어 사라지는 네 뒷모습이 보여. 길을 따라 감도는 익숙한 향기, 그 위에서 나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옷장으로 향해. 음악은 이제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어.
신발을 신고 나가려다 말고 조금만 더 있으면 싶어지네. 옷자락에 묻은 이 향기가 조금이라도 오래갈 수 있게. 길가에서 버스 안에서 향기를 맡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게.
마침내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너도 이미 나간 뒤일까? 안 돼,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야. 나는 머리를 흔들고 발걸음을 재촉해. 괜찮아, 우린 언젠가 어디선가 또 마주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