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교문 바깥에는 항상 누군가 서 있었다. 학교 끝나고 나오는 아이를 부모일 수도 있고, 병아리가 담긴 상자를 놓고 앉아있는 할머니일 수도 있고, 길 앞에 군것질거리들을 잔뜩 늘어놓은 구멍가게 아저씨일 수도 있다. 해가 반짝 떴을 즈음, 덜 여문 목소리로 지저귀는 아이들 무리에 섞여 교문을 나오다 어떤 애가 부모의 품에 안기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가, 그다음에는 한시도 쉬지 않고 짹짹거리는 소리에 박스 안을 무심하게 쳐다보았다가, 쥐포 굽는 기계 앞에서 주머니에 남은 용돈과 눈앞의 달콤함을 저울질하다 결국 제일 싼 소시지를 골라 냠냠거리며 집으로 향하곤 했다.
1년 중 얼마동안은 평소보다 훨씬 시끌벅적한 때도 있다. 그중 하나는 새 학기가 시작될 때였는데, 새로운 마음으로 학교 생활을 하려는 아이들의 결심에 편승해 보려는 학원들이 물밑작업에 들어가는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학기가 시작되고 첫날 교문을 나가면 아저씨들이 피크닉 테이블 위에 장난감을 세워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보통 이런 식으로 적혀 있었다.
‘OO태권도장 새 학기 이벤트, 등록 시 1개월은 회비 면제, 장난감 증정….’ 그래서 무리 중 몇몇은 유혹을 못 이겨 그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고, 성질이 급한 아이들은 뭘 받고 싶다고 점을 찍어놓기도 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학습지 회사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공세에 나섰다. 이들은 태권도장과 달리 아주머니들이 주로 영업을 했고, 장난감도 성별에 따라 반반씩 진열해 놓았다. 학기가 지날수록 영업 전쟁은 더 대담해져서 심지어는 커다란 솜사탕 기계를 가져다 놓고 막대를 휘휘 젓고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던 아이들도 발걸음을 돌려 그곳을 지나치지 않고는 못 배겼다.
나는 학습지는 물론이고 태권도와 장난감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한 번도 어른들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장난감에 넘어가 도장에 등록한 친구들에 따르면, 처음 구경만 해야지란 생각으로 테이블에 다가가면 아저씨가 어떤 걸 갖고 싶냐고 물어본다고 한다. 이거요 저거요 손짓으로 고른 다음에는 종이를 한 장 건네주면서 빈칸을 써달라고 한다. 거기에는 이름과 학교,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는 칸이 있다. 다 적고 나면 종이를 가져가면서 집에 돌아갈 때쯤 전화가 갈 것이니 받아달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도장에서 전화가 오면 집에 있던 부모님과 ‘아드님/따님이 도장에 다니고 싶다고 하셔서…’라는 말과 함께 상담을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은 누군가 나에게 같은 도장을 가자고 졸라댄 적이 있었다. 자기가 다니고 있는 도장에 와서 배우고 놀자고 한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다른 기억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친한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다닐 마음이 없어서 처음부터 거절했지만 그 애는 무슨 심보인지 며칠 동안이나 매달려서 물어보았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약했던 나는 나중에는 권유가 아니라 부탁에 가까운 목소리에 못 이겨 알았다고 했고, 결국 집으로 전화가 걸려오고 말았다. TV를 보고 있던 엄마는 영문을 모르고 전화를 받았다가 내 표정을 보더니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제야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 애가 친하지도 않은 나와 진심으로 같이 다니고 싶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도장에 친구를 데려와 등록하면 데려온 자신도 혜택을 받는 제도가 있었으므로 그것에 혹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 같이 자랐던 아이들은 대부분 남자면 태권도장을, 여자면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그런데 내가 하지 않았던 건 다른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기도 했다. 나는 태권도보다 검도가 더 멋있다고 생각했다.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새까만 도복에 은색으로 빛나는 검을 들고 날렵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도장 간판에 적힌 ‘대한 검도’라는 단어 또한 검도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술이고 배우면서 자부심을 느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일이 있은 후 엄마에게 태권도 대신 검도를 배우게 해달라고 했고, 곧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도장에 들어간 첫날, 도복과 하얀 띠를 받았다. 옷을 갈아입은 후 선배들이 데리고 다니면서 도장을 소개해 주었다. 바닥은 두꺼운 초록색 고무 매트를 깔아놓았다. 태권도와 마찬가지로 맨발로 하는 운동이고 수련 중에 넘어지거나 해서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장 맨 뒤에는 종류별로 검 보관대가 있었다. 그리고 도장 곳곳에는 혼자 연습할 수 있는 타격대가 있었다. 주로 타격 연습을 하는 머리, 손목, 허리 위치에 맞게 단단한 쿠션이 달려있어 죽도로 칠 때마다 퍽하고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사범님의 사무 공간이 있는 안쪽에는 천장까지 닿는 수납장이 벽을 가리고 있었는데, 수납장 칸마다 호구라고 하는 대련 장비가 들어있었다. 공용으로 사용하는 낡고 밋밋한 것부터 위로 갈수록 앞에 이름 택이 붙어있거나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도 있었다. 선배는 가장 위쪽 칸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호구를 가리키면서 사범님 거라고, 자기 것도 아닌데 괜히 으쓱거렸다.
도장 소개가 끝나고 나서는 사범님이 마주 앉아 수업 방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품새가 어쩌고, 연습 시간에는 어쩌고, 꽤 오랫동안 말씀하셨지만 나는 거의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사범님은 주위에 서있던 애들에게 돈을 주고 과자를 사 오라고 했다. 이곳은 새로운 친구가 오면 과자 파티를 여는 것이 관례였고, 얼마 뒤 띠에 상관없이 바닥에 둘러앉아 과자 봉지를 펼쳐놓고 먹으면서 조금씩 친해졌다.
수업 시간에는 사범님이 앞에 나오셔서 자세를 가르쳐주시거나 아니면 그동안 배웠던 자세들을 반복해서 연습했다. 검도는 검을 휘두르는 자세뿐만 아니라 발놀림도 굉장히 중요해서 발을 다양하게 움직이며 휘두르는 연습을 많이 했다. 이따금 아이들끼리 대련 토너먼트를 하기도 했는데 즉석으로 대진표를 짠 뒤 돌아가면서 호구를 쓰고 맞붙었다. 나는 두 달이 넘은 다음부터 대련에 참가할 수 있었다. 선배들이 이제 호구를 쓸 때가 되었다며 각자 장비를 하나씩 들고 정성스럽게 입혀주었다.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순간은 머리 부분을 눌러쓸 때였는데,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쾨쾨한 냄새가 코 안으로 훅 들어오는 바람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쇠창살 같은 보호쇠가 눈앞을 막고 있었고 뒤에 달린 끈을 머리가 아플 만큼 세게 묶어놓아서 더러 겁도 났다. 전부 착용한 뒤에는 비틀비틀 일어나 대련을 준비했다. 상대는 나와 마찬가지로 대련이 처음인 아이였다. 우리는 어정쩡하게 마주 보고 선 채, 한 차례 기합을 내지르면서 첫 번째 시합을 시작했다.
검도장에서는 두 달 정도에 한 번씩 승급 심사를 했다. 사범님과 유단자 선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같은 띠를 맨 아이들끼리 나란히 서서 배운 자세를 해 보이는 것이다. 나는 다니는 동안 한 번도 심사에서 떨어진 적 없이 쑥쑥 띠를 올려 받았다. 승급을 하고 높은 띠로 갈아 메고 나면 잠시 동안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배에 힘이 들어갔다. 도장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유단자를 상징하는 검은 띠였는데, 그것에 비하면 우리가 멘 색색깔 띠는 촌스럽기 그지없었고 애들이나 하는 띠 같았다. 몸에 안 맞게 큰 옷을 입고 뒤뚱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 검은 띠는 재질이 달라 멀리서 봐도 반짝반짝 윤기가 났고 너비가 짧아 날렵해 보이기까지 했다. 타격대를 마주 보고 연습을 하다 지치더라도, 검은 띠를 매고 허리춤에 죽도를 꽂은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다시 힘이 솟아서 연습에 매진하곤 했다.
검도를 배운 지 1년이 다 되었을 때쯤, 나는 도장에서 참가하는 대회에 따라 출전했다. 한겨울 날씨에 꼭두새벽부터 도장 차를 타고 대회장으로 가야 했던 덕분에 엄마는 칠흑 같은 밤에 일어나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비몽사몽 한 채 일어나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닦였고, 두꺼운 옷과 패딩에 둘둘 말려 대회장까지 보내졌다. 차에 탔던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사범님만 눈빛이 깨있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눈이 퀭해서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회가 진행되고 있는 체육관에 들어가자마자 잠이 확 깼다. 체육관 안은 비슷한 도복을 입은 수많은 아이와 어른들로 가득했다. 자기 몸만 한 호구를 들고 낑낑거리며 걸어가는 아이, 자리에 앉아서 죽도를 손질하고 있는 아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지켜야 할 점을 말하고 있는 다른 도장 사범님,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전부 검도인밖에 없었다. 어느 한쪽에서는 이미 시합이 펼쳐지고 있었고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와 시원하게 부딪히는 죽도 소리가 체육관을 가득 울렸다. 나는 가슴이 뛰었고 그제야 대회에 참가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30분 정도 기다린 뒤 사범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저 대기실로 가면 시합을 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아까 본 애처럼 호구를 챙겨 들고 뒤뚱뒤뚱 대기실로 갔다. 직원인 듯한 사람이 내 이름을 확인한 뒤 호구를 쓰고 시합에 나갈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나는 도장에서 대련했던 순간이나 제일 자신 있는 타격 부위 등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호구를 입었다.
곧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얼굴도 모르는 아이와 마주 보고 서서 죽도를 겨누었다. 가운데에 선 심판은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자기가 주는 신호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 같았으나 너무 시끄러워서 하나도 안 들렸다. 심판의 손짓 몇 번에 어영부영 시합이 시작되었고 나는 마치 처음 대련을 하던 순간처럼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 차례 죽도가 오갔고, 중간중간 어딜 때려야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제대로 때렸는지도 의문이었다. 맞은 것은 더욱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그리고 곧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시합이 끝났고, 나는 죽도를 내려놓으며 어쩐지 이겼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심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판이 내 쪽으로 손을 들었다! 나는 룰을 하나도 몰랐지만 내 쪽으로 손을 들었다는 것은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 내가 이겼다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들뜬 마음으로 다음 경기를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멀리서 사범님이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쫑쫑거리며 걸어가 호구를 벗고 저 이겼어요라고 했더니 사범님은 웃으시면서 그러냐고, 조금 있다 가야 하니 애들하고 같이 기다리라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그럼 진 건가…? 아닌데, 분명 내 쪽으로 손을 들었는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결국 얌전히 차를 타고 돌아갔던 것 같다.
옛날이야기를 쓰다 보면 좋은 점은(다른 추억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기억을 나누어 가졌던 사람들과 감상에 빠져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에 대한 한 사람의 기억이란 오롯하게 존재할 수가 없어서 당시 사람들과 함께 공평하게 그 기억을 잘라서 받게 되는데, 언젠가 그것들을 퍼즐 조각처럼 끼워 맞출 수 있는 시간이 오면 홀로 그 기억을 향유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가족들과 행복했던 순간들을 매만져보았고, 그것들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이 귀중하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