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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Sep 18. 2023

첫 중학교(2)

첫 선생님

 초등학교는 너무 어려 멋모르고 다닌다. 고등학교는 내내 수능과 대입에 허덕인다. 그 사이에서 중학교의 3년은 적당한 나이에 책임질 것 없이도 한없이 즐거울 수 있는 때이지 않을까. 점심시간에 식판을 싹싹 긁어먹은 뒤 다음 5교시에 닥쳐오는 식곤증에 꾸벅꾸벅 졸다가, 종이 울리면 눈을 비비며 느적느적 걸어가 은행나무 아래 벤치에서 햇볕을 쬐고 있으면 그만이던 시절. 내가 사랑한 건 그런 봄날 같은 기억이다. 그러다 불현듯 든 생각이 있었다. 우리만 행복했을까? 우리를 가르치고, 함께 하루의 반을 보내고, 즐거운 일 슬픈 일 가리지 않고 나누었던 선생님들은 어땠을까? 당시에는 너무도 멀리 있는 사람들이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노는 것이 더 재미있기도 했지만 적어도 내게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다가가기에는 먼 ‘어른’이었다. 하지만 선생님도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이었고, 우리보다 더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학교에 있던 때 그들은 어땠을까? 가르치는 애들처럼 수업시간에 졸거나, 점심시간에 돈가스를 3개씩 가져다 놓고 먹거나, 운동장을 산책하며 햇빛을 만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커피를 타먹으며 수다를 떨거나 수업이 비는 시간에 밖을 거닐다 오거나 하는 식으로 어른의 자유를 만끽하며 재미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만났던 친구들이 모두 한 가지 매력이 있던 것처럼 선생님들도 그랬다. 이 글을 빌려 기억을 공유하고 싶다. 


  영어 선생님을 처음 보았을 때, 디즈니에 나오는 공주님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얀 피부에 몸은 아주 가늘었고, 특히 긴 머리카락이 라푼젤을 많이 닮았다. 말이나 행동도 사근사근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수명산에 살고 있는 요정과 이야기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첫 수업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수업 시간 종이 울리고 나서 예쁘고 교실 문을 낑낑거리면서 열 것 같이 마른 사람이 교탁에 오더니 자신을 영어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처음으로 한 질문이 “영어를 배운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속으로 ‘배우긴 배웠는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초등학교 때도 배웠겠지만 다들 진도가 다를 것이므로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했더니, 오선지에 알파벳 대소문자와 필기체를 쓰는 방법부터 배우는 것이었다. 칠판에 흰 분필로 다섯 개의 선과 알파벳 a가 적힐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이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노트를 꺼내고 열심히 받아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떠올려 보면 초등학교 때는 중간중간 보거나 배웠을 뿐 이렇게 체계적으로 배운 적은 없었기 때문에 어렴풋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때 처음으로 g는 아래쪽 동그라미를 중간 선 아래로 한 바퀴 돌면서 써야 한다든가, 필기체 s는 전혀 s와 닮지 않은 모양으로 써야 한다는 것 등을 배웠으므로 지금까지 알파벳과 필기체를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선생님 덕이다.

1학년 때 가장 친했던 선생님이기도 했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 선한 분위기가 어느새 내게도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다가가 물어봤고 선생님은 한 번도 귀찮은 기색 없이 알려주셨고 알려주실 때마다 또 물어볼 게 있으면 언제든지 오라고 하셨다. 또 수업에 들어오면 항상 내게 말을 걸어주셨고 귀여워해주셨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장 좋았던 선생님 1등을 뽑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가장 이상한 선생님을 뽑는 것은 아주 쉽다. 미술 선생님은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선생님뿐만 아니라 사람들 전체 중에서도 이상함 순위에서 밀리지 않을 것이다. 학기 초에 첫 수업에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들 사이에서는 괴짜라고 소문이 파다했는데, 이미 수업을 받아본 다른 반에서 들리는 말로는 떠들거나 딴짓을 하다 걸리면 머리를 세게 깨무는데 엄청 아프다고 했다. 머릿속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서 또는 에이, 얼마나 아프겠어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교실에서 실제로 그 광경을 보고는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흉흉한 소문대로 행동하리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점잖은 모습으로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다가, 마침 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시고는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소문을 떠올리며 숨을 죽이고 눈만 그 아이를 따라갔다. 그때 선생님이 그 애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먹이를 포착한 독수리처럼 도망가지 못하게 머리를 단단히 붙잡더니 앙, 하고 입을 벌려 깨물었다. 그리고 그걸 보는 우리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다. 깨물린 아이는 아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아파서보다 수치심에 더 크게 소리를 지른 것 같았다. 

선생님은 몇 달 주기로 벌칙을 바꾸었다. 수업을 안 하시는 동안은 어떤 벌칙이 더 신선하고 재미있을지 계속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바뀌는 벌칙마다 기상천외했는데,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선채로 입술을 내밀어 책상에 붙이고 있기다. 가만히 서서 몸을 구부려있는 것이니 몸이 힘들지는 않지만 이것도 마찬가지로 수치심이 들거니와 입술을 계속 내밀고 있어야 해서 입술 근처가 저려온다. 2학기 때는 감옥이라고 해서 교실 뒷문 구석에 서게 한 다음 뒷문을 열어서 그 사이에 가두는 것이었다. 한 명이 이 벌칙에 걸리면 수업 내내 앉아있던 애들이 그쪽을 바라보며 킥킥댔다. 

수업 내용도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그렸을 수채화니 데생이니 하는 것들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점묘화를 가르쳤는데 다음 실기 과제로 도화지에 점 수백 개를 찍어 그림을 그려오라고 한 적도 있었고, 그다음에는 모나미 펜으로 건물이나 물건, 사람으로 B4 도화지를 가득 채워서 그려오라고 했고 같은 그림이 여러 개 있다거나 여백이 많으면 감점했다. 모여서 점을 도도도도 찍거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도화지를 채우던 애들은 회의가 오면 이게 무슨 그림이냐, 막일 아니냐며 투덜거리다가도 눈앞에 점수가 아른거려 손목을 부여잡으며 다시 그리곤 했다. 사실 이 선생님이 떠오른 것은 글을 쓰기 이전 최근 열린 요시다 유니 전을 보았을 때였다. 디지털 작업으로 잠깐이면 할 수 있는 것들을 실제로 나타내려고 온갖 고생을 하고 시간을 쓰는 영상을 보고 나서 문득 선생님의 과제가 생각났다. 선생님은 과제 내용 자체보다는 예술은 고달픈 노동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세월이 흘러 글을 쓰는 창작 활동을 하게 되면서 느끼게 된다. 미술보다는 몸이 덜 힘들지 몰라도 매일 머리를 싸매며 단어와 문장을 골라낸다. 이 모습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진짜 예술가가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수학 익힘책’이라는 과목을 들어본 적 있는지? 현재 교육 과정에서는 사라진 이 책은 수학 과목이기는 하나 수학 교과서와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로만 이루어져 있는 책이다. 사회 과목의 부록으로 쓰이는 사회과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이 책에는 교과서에도 있는 기본 문제는 물론이고 심화 문제까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언뜻 수학 선생님이 개념을 가르치신 뒤 숙제용으로 쓰일 것 같은 이 책에도 담당 선생님이 계셨는데, 인자한 얼굴에 과묵하신 할아버지가 가르치셨다. 선생님은 항상 수업 종이 치자마자 교실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쉬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놀던 우리는 허둥지둥 책상에 앉아 서랍을 뒤적거려 책을 꺼내곤 했다. 그리고 우리가 인사할 준비를 하는 동안 선생님은 교탁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려주셨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나면 뒤돌아서 칠판에 하나씩 문제를 적으며 풀기 시작하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선생님께 매우 죄송하지만, 자기에 너무 좋은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의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 칠판에 분필이 부딪히며 내는 탓 탓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이 솔솔 왔다. 특히 점심시간 바로 뒤 5교시 수업일 때는 코끼리도 꿈나라로 갈 수밖에 없는 강력한 수면제나 다름없었다. 쏟아지는 따뜻한 햇볕,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슬 부는 바람을 맞으며 나는 속으로 '그래, 이건 잘 수밖에 없어' 하고 눈을 감았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말을 건네는 법이 잘 없었다. 칭찬이든 지적이든 말이다. 자는 것이나 잠깐 떠드는 것도 어느 정도는 용납되었다. 수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심하면 그제야 선생님은 그쪽을 돌아보았고, 눈에 들어온 아이에게 뒤에 가서 서있으라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선생님들마다 회초리 하나씩은 들고 다니고 손이나 발로 학생을 때리던 일도 왕왕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생님은 우리가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퇴직하셨는데, 그동안의 복수였는지 선물이었는지, 퇴직하시기 전에 낸 기말고사 문제가 끔찍하게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시험이 끝나고 말도 안 되는 난이도에 투덜거리던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며 다들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어떤 수업들은 이동 수업이라고 해서 다른 교실이나 장소에서 수업을 들었다. 수학과 영어 과목은 성적순으로 우반과 열반 교실을 분리해 차등 수업을 했고 특히 예체능 과목은 각기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음악 과목이 기억에 남는데, 음악실에 가기 위해 우리는 책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 지하 복도를 걸어갔다. 친구들끼리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음악실을 갈 때는 덜했지만 그 복도를 혼자 걸을 때는 조금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스네이프의 마법약 수업을 들으러 가는 해리의 심정처럼. 물론 음악 선생님이 스네이프처럼 음침하고 무서운 사람은 아니었고 오히려 톡톡 튀고 경쾌한 성격을 가진 분이셨다. 성악을 전공하셔서 평소에는 우아한 목소리로 수업을 하시다가 딴짓을 하는 애들을 발견하면 돌변해서 우렁찬 성량으로 혼내곤 했다. 

음악실은 교실처럼 책상이 없고 교회에서 쓰는 나무 의자에 일렬로 앉아 수업을 들었다.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 노래를 배우거나 리코더를 불었다. 선생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면 우리가 따라서 부르기도 했고, 한 소절씩 따라서 부르기도 했다. 당시 제일 악명 높은 악기는 단소였다. 실기 시험으로 단소 불기가 발표된 날부터 반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운지법이야 리코더와 비슷한 원리이니 어렵지 않았지만 중요한 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단소는 입구를 입술로 잘 틀어막고 위쪽에 살짝 난 구멍으로 바람을 불어넣어 소리를 내야 하는데, 머리가 아플 때까지 바람을 불어도 픽- 하고 바람 새는 소리만 가끔 날 뿐이었다. 결국 시험 전날 엄마에게 SOS를 요청해 부는 법을 배웠지만(나는 왜 빨리 물어보지 않았던 걸까?)결과는 영 좋지 않았고, 아직까지 나에게 단소란 어렵고 불편한 악기로 기억에 남아있다.


 과거를 돌아본 내게 이들뿐만 아니라 이곳에 적지 않은 선생님들 모두 하나의 어벤저스다. 모든 분들이 무엇 하나 겹치는 것 없이 개성 있고 매력적이었고, 학생들을 대하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학생들도 그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함께 합을 맞추어 중학교 3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비록 선생님들도 당시에 지금의 우리처럼 일개 회사원에 불과하고, 삶에 쫓겨 하루하루 살아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해 가르쳐준 덕분에 우리가 여러분을 대신해 여기 이 자리에 서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본다. 우리도 곧 후손들에게 그것들을 전해줄 것이고, 이렇게 해서 역사가 생겨나고, 인류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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