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양이 장미꽃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나 보다. 좋아하는(혹은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것에 마음을 오래 쓰기가 괴롭고 불편하다. 주변에 책과 글, 그리고 영화와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내 마음은 진짜일까? 몸과 마음이 힘들 때 진정시켜 주는 건 오히려 갖가지 네모난 상자들이다. 오래된 글귀에 눈물 방울방울 흘리다가도 정작 상자 속을 뒤져 도파민 가루를 박박 긁어내는 데에 시간을 더 오래 보낸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라 산란한 디지털 불빛의 편린으로 존재하게 되어,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러다 보니 이따금은 내가 뭐가 되려는지, 정해둔 길을 따라 잘 가고 있는 것인지 잊어버릴 때도 있다.
지금까지 어린 왕자를 세 번 읽었다. 십대에 필수 도서로 한 번, 이십대에는 문득 생각이 나 책을 사서 두 번, 그리고 서른을 넘긴 지금 세 번째다. 이번에는 책이 하고 싶은 말을 더 잘 이해하게 된 느낌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작가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앞의 두 번 동안 책을 덮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서문에 나오는 ‘어른들은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라는 문구가 오늘에야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제야 나도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발을 멈추고 걸어왔던 길을 돌아봤다.
서랍 맨 아래 깔려있을 인형을 꺼내 먼지를 털어볼 수도 있다. 대개 세월이 지나 기억 속에서 잊힌 것이거나 영원히 곁에 있을 거라 지각하는 것들이다. 괜찮아, 한번 쏟은 마음은 절대 어딘가로 사라지진 않으니까.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금방이라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나온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 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얼굴을 볼 걸 그랬다고 후회할 때조차 불안하고 더욱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그 감정에 책임이 있다.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필요하다. 가장 가까이 있지만 무심히 마음을 쏟지 않는 것들, 혹은 거절할까 무서워 먼저 밀어낸 것들에게 다시 손 내밀어 본다. 좋아하는 이 마음은 겨울날 장독대처럼 꼭꼭 담아둘지언정 멀리 떠나보낼 순 없으니까. Y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정원에 핀 장미꽃만큼이나 수많이 존재하겠지만 내가 진실로 알고 좋아하는 마음을 쏟을 Y는 세상에 오직 한명밖에 없다. D를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을 들킬까봐 어색한 몸짓을 하고 새된 목소리로 둘러댔다.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무턱대고 앞섰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전전긍긍하다 결국 그는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닐 거라고 단정짓고 헤어졌다. 그리고 며칠 전 D에게 미안하다고, 다시 잘 지내고 싶다고 손을 내밀었다. D는 스스럼없이 나를 받아주었다. 그가 고마우면서도 이제야 내가 나 자신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다섯의 평균이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 사업가이자 동기부여 강연가인 짐 론의 말이다. 평균이라는 것은 결국 숫자로 계산된 값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또 어떻게 계산해서 매긴 걸까? 업무 능력이나 월 평균 적금 비율 같은 것이 기준일지 모른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허를 찔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누가 가까운 사람이고 그들 중 누가 나보다 위고 아래인지를 검토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내 주위로 동그란 원이 그려지고 그 위에 가까운 사람들이 별처럼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위아래는 물론이고 평균을 매길 수가 없는 존재다. 마치 엑셀에서 평균 함수를 쓴 뒤 괄호 안에 “A”, “B”, “C”, “D”, “E” 를 입력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서로 무엇 하나 같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색깔도 다르며, 형체 또한 고유하다. 그들은 각각의 고유함으로 내게 끊임없는 활기와 다양한 영감을 불어넣어준다. 그래서 이 문제는 내게 지식과 전문성이 아니라 취향과 성격의 영역이다.
나만의 정원을 만들고 잘 꾸미고 싶다. 향기가 좋고 무해한 꽃들로 길을 따라 심어두고, 볕이 좋은 날이면 옆에 앉아서 내내 수다를 떨고 싶다. 맑은 물을 주고 벌레를 떼어주면서 그들이 이곳에서 깊게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사는 것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