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 르네 마그리트
검은 양복을 입은, 아마도 남자일 한 사람과 붉은 옷을 입은 여인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하얀 베일을 뒤집어쓴 채 키스하고 있다. 마그리트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 시선을 끌어당기는 분위가와 함께 정밀하게 그려진 베일이 유난히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
1928년에 그려진 작품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 그림이 현대까지 통용된다고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100년 전에도 이미 서로가 알아보지 못할 만큼 두꺼운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지금은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라도 쳐져있는 게 아닐까?
마그리트가 14살 때 그의 어머니는 투신자살을 했다. 그때 마그리트는 옷을 뒤집어쓴 어머니의 시신을 보았다고 한다. 그에게 하얀 베일이란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본질적인 단절과 이별을 상징하는 은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혹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의 속내를 알 수 없고, 언제든 그/그녀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비극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경험을 하고 그로 인한 생각들을 거칠수록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가장 어려움을 느낀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쉽다. 그 사람의 세계를 부정하고 경멸하거나 무시하면 된다. 그럼으로써 그 삶에 쓰여진 역사도 앞으로 펼쳐질 미래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랑이 어려운 점은, 단어 자체의 의미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수많은 행위들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어떤 존재를 열렬히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뒤에는 존중과 이해, 배려, 변화에의 의지가 뒤따른다. 스스로에게도 하지 못하는 것들을 많게는 수십 년간 전혀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에게 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가소롭기까지 할 정도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경계 바깥에 있는 세계, 그곳의 존재가 나를 정의하고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가 전부인 사람은 사람보다 사물에 더 가깝다.
사랑은 결핍의 인식과 미지 세계로의 끌림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경계 바깥의 미지와 접촉했을 때 깜짝 놀라거나 두려움에 떨거나 환희에 차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처음 알고 있었던 경계들은 다시 그려지고 비로소 나의 결핍과 상대의 결핍이 마주본다. 이 결핍들은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혹은 상대방을 완전해지게 만들기 위해 만나지 않아야 한다. 나의 ‘없음’ 을 상대의 ‘있음’ 으로 채우려는 욕구는 순간의 충족으로 휘발될 뿐, ‘있음’ 으로 채워지는 순간 그 관계는 효용을 다한다. 하지만 ‘없음’ 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랑의 영원성은 서로가 결핍을 잘 보이는 곳에 두고 고요히 마주보고 있을 때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스스로의 ‘없음’ 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충동과 불안은 상대의 결핍을 인식하는 것에서 비로소 잠잠해진다. 그리고 결핍들의 속성에서 공통점을 찾을 때, 우리는 함께 존재하되 서로를 얽어매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