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비행

로마를 거쳐 니스로

by knokno


스크린샷 2025-12-23 오후 4.13.30.png 구름 위를 나는 경험은 몇 번을 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눈을 뜨자마자 창밖을 바라보고 안심했다. 나는 구름 위를 날고 있었고, 점차 여행을 떠났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왜 많은 나라들 중에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는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프랑스는 가는 이유를 댈 필요가 없는 나라 중 하나다. 아름다운 도시 양식, 에펠 탑과 센 강,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 그리고 고급스러운 패션으로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이 선망해 마지않는 곳이니까. 나 또한 그런 선망을 가지고 있다. 특히 패션에 관해서는, 프랑스 사람들이 옷을 대하는 방식이 궁금했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그들을 지켜보는 모습을 오랫동안 꿈꿔왔다. 마침 내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패션 위크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 꿈은 곧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브랜드 르메르의 본점에서 옷을 구경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샤넬도 빠질 수 없다. 캉봉 가의 전설처럼 수십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샤넬 본점에 가브리엘 샤넬의 유산이 남아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근대 예술가들이 묻혀 있는 곳을 찾아보고 그들을 기념하는 미술관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행할 당시 현대미술의 보고인 퐁피두 센터는 리모델링 중이었기 때문에 방문할 수 없었지만, 루브르와 오르세, 모네의 영혼이 담겨 있는 오랑주리, 한때 로댕의 거처이자 작업실이었고 지금은 미술관으로 거듭난 로댕 미술관과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등 사진으로만 보았던 곳을 가보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이보다도 더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가 그곳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어느 시골 묘지에 묻혀 있고, 직접 보고 대화할 수는 없어도 묘지에서 그녀가 선사해준 영감에 감사하고 추모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작가의 이름은 프랑수아즈 사강이고, 프랑스 중부의 쇠작이라는 지역에 묻혀 있다. 어떤 대중교통으로도 갈 수 없는 그곳을 가기 위해, 그리고 그 여정에서 예술가들의 열정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나는 프랑스로 오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하여 반 고흐를 포함한 수많은 화가들을 빛과 색으로 감화시켰던 신비로운 항구도시 니스부터 피카소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앙티브, 작은 어촌에서 우아한 휴양지로 이름난 생트로페, 사과 하나로 세상을 뒤집어보겠다던 폴 세잔의 도시 엑상프로방스, 그리고 툴루즈를 지나 마침내 그곳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다시 비행기 안으로 돌아오자.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마다 옆 사람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점을 빼면, 창가 자리가 장시간 비행을 하기에 적절하다. 철창에 갇혀 사육되는 것처럼 안전벨트에 묶여 기내식을 먹고 앉아 있으면 답답해지는 때가 오는데, 그때 가림막을 열고 하염없이 푸르기만 한 하늘과 구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환기가 되는 덕분이다. 비행기 안은 마치 입원실 같은 느낌이다. 사방에 유혹하는 것들이 많고 최첨단 기기들이 동시에 많은 것들을 신경쓰라고 제안해 바쁘지 않으면서도 바쁜 지금 시대에 자리에 차분하게 앉아서 한 가지에만 집중하게 해주는 합법적 디톡스 환경을 제공하는 장소는 많지 않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 훨씬 집중이 잘 된다. 지금도 그것보다 중독성 있는 것들이 사라지면 책이 재미있어지는데, 책이 전부였던 옛날에는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스크린샷 2025-12-23 오후 4.11.57.png 기내에서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 버드런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소설책 두 권을 다 읽고 나머지 인문학 책을 읽다가 머리가 아파질 때쯤 그만두고 잠들기를 반복하다, 문득 답답함에 창문 가림막을 열었을 때 처음으로 바다가 아닌 육지의 산맥이 보였다. 정확하지 않으나 경로상 북아프리카에 있는 아틀라스 산맥인 것 같았다. 그 뒤로 한참을 더 비행해 바다를 지나 이탈리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참 위에서 바라본 모습이라 그런지 내가 아는 무성한 푸른 산이 아니어서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치 다른 행성의 사진에 찍힌 개척되지 않은 산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신이 손으로 직접 대지를 조각해서 만든 것 같았다. 이탈리아 남부를 지날 때는 운이 좋게도 내가 앉아 있는 오른편으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석양을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빌딩이나 아파트는 물론이고 자연으로부터도 가려져 있지 않은 순수한 석양의 모습은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사람들은 저마다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구름들은 마치 호안 미로의 그림처럼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고 풍경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DCB5ADA8-3AB8-4363-9ABC-5B19EBB44BA2_1_105_c.jpeg 이탈리아 남동부 오스투니 상공에서 바라본 하늘


로마에 도착하고 나서 입국 심사대로 걸어갈 때 표지판에 적힌 이탈리아어를 보고 드디어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그런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데는 미켈란젤로 단 한 명으로 충분했다. 내가 로마에 있다니! 니스로 가는 비행기가 출발하기까지는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나는 우선 공항 밖으로 나갔다. 로마의 공기를 맡고 싶었기 때문이다. 밤 9시의 날씨는 매우 더웠다. 어쩌면 우리나라보다 더 덥고 습할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모두 길쭉하고 날렵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비율도 좋았다. 여자들조차 예쁘다고 표현하기 이전에 잘생겼다. 그리고 옷도 매우 잘 입었다. 강렬한 색, 혹은 화려한 무늬가 전혀 튀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잘 어울렸다. 나는 도덕성을 따지기 이전에, 이탈리아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외모 인종차별이 왜 존재하는지를 역으로 깨달았다. 그들은 너무 잘생긴 것이다.


FE1EC490-DC6E-4CC7-8133-42E1AFB39193_1_105_c.jpeg 유럽에서 먹은 첫 파스타

니스로 떠나는 출국 절차를 마친 뒤 조그만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먹었다.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에 이탈리아 음식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경험상 공항에 있는 음식들은 비싸기만 하고 썩 맛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파스타를 받았을 때 모양새나 첫입에 넣었을 때 면의 질감이 한국에서 먹던 것과 천지차이였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바로 옆에 있는 일리 커피에서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셨다. 한국에 있는 일리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셔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비교는 어렵지만, 이탈리아 커피는 한국보다 조금 더 진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때도 내가 주문을 한 뒤에 한 할아버지가 따라 주문을 하고 직원과 한참 떠들다 갔다. 나는 그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졌고 부러웠다.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주저없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야기하고 또 들어줄 여유가 있는 모습이 이곳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편안한 상태에 있고 타인에 대한 의심이나 경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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