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도착

니스 코트다쥐르 공항에서 도보로 한 시간

by knokno
스크린샷 2026-01-02 오후 12.42.12.png 공항에서 나오는 길


니스 코트다쥐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가 막 지나가고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여행 가방을 되찾은 뒤 공항을 걸어 나오는 길에 나는 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식료품점을 포함한 모든 가게가 문을 닫은 뒤였고 관광 안내소조차 문을 닫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이었고, 유럽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만큼 근면 성실하지 않았다. 사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해외 로밍이나 이심 서비스를 따로 신청하지 않고 현지에 도착한 뒤 유심을 사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시작부터 중대한 난관에 빠진 셈이었다. 나는 다급한 심정으로 퇴근 준비하고 있는 안내소 직원에게 말을 걸어 지금 유심 카드를 살 수 있는 곳이 없냐고 물어보았다(그들은 유심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고 심 카드라고 해야 알아들었다). 직원은 지금은 모두 문을 닫았고 내일 아침 10시쯤 오라고 대답해 주었다. 어떡하나… 내가 잡은 숙소는 니스에서 택시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었고, 원래 계획에는 며칠 뒤에나 니스 공항을 거쳐 기차역으로 갈 예정이었다. 까막눈 관광객에게 단 며칠이라도 인터넷을 쓰지 못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공항 바깥에서 생각을 거듭하다 결국 오늘은 편안하게 잔 뒤 내일 다시 공항으로 돌아오기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일은 이후 나의 게으름과 합쳐져 거대한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스크린샷 2026-01-02 오후 12.43.07.png 나폴레옹 3세 다리를 건너며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택시로 단 15분이 걸렸지만, 젊은 택시 기사는 내가 찍어준 곳을 보더니 심정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5만원을 불렀다. 뭐? 나는 듣자마자 오기가 생겨서 쿨하게 거절했다. 어차피 여행인데 걸어가고 만다. 오히려 거리 구경도 하고 좋지 뭐. 그리하여 나는 1시간이 넘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데이터나 와이파이가 없는 상태에서도 애플 지도 앱은 정상 작동이 되어서 길을 찾는 데에는 어렵지 않았다. 지도상 공항에서 왼쪽으로 가면 나폴레옹 3세 다리를 건너 카뉴-쉬르-메르 지방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면서 처음으로 먼 곳 타지로 여행을 왔다는 것을 절절히 느꼈다. 고즈넉한 느낌을 주는 벽돌 난간과 철제 가로등, 그리고 불그스름한 조명 아래 지나가는 이국적인 모양의 차들과 건물들.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바로 그 색과 채도였다. 버섯 같이 자란 커다란 나무와 우리나라의 구축 아파트처럼 생겼지만 훨씬 운치 있는 아파트들이 보였고, 자정이 넘었는데도 킥보드나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쳤다. 나는 가방을 메고 캐리어를 끌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스크린샷 2026-01-02 오후 12.47.09.png 밤에 봐도 참 예쁜 아파트들


거리에 듬성듬성 서 있는 아파트들은 위에 말했듯 대부분 한국의 구축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도 한국에서 볼 때처럼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낡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오랜 시간 동안 세심하게 관리를 한 데다, 한 층의 복도 난간 부분을 콘크리트가 아니라 철창이나 장식을 넣어서 만들고 천장에는 색과 무늬가 들어간 차양이 건물에 활기를 돋우는 것 같았다. 또한 한국처럼 복도 난간을 만들 때 건물의 양쪽 끝을 연결해서 만들기보다 본래 건물에 공간을 덧붙여서 만들다 보니 건물의 볼륨감이 더 사는 것 같기도 했다.



스크린샷 2026-01-02 오후 1.07.23.png
스크린샷 2026-01-02 오후 1.07.41.png


아파트를 제외하고 개성 있는 건물들도 보였다. 서로 다르게 생긴 모양의 방을 제각각 이어붙여서 만든 것 같은 건물도 있었고, 같은 모양인데 층별로 각도를 다르게 해서 저택 같은 느낌을 주는 건물도 있었다. 그리고 ‘Université de la Mer’ 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학교도 있었다. 이 건물은 제주도에서 볼 법한 화강암 재질에 등대 모양을 띠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나중에 찾아보니 우리나라의 대학교와 같은 의미는 아니고 사설 교육기관인 것 같았다. 간판을 보면서 Mer라는 단어가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크린샷 2026-01-02 오후 12.44.41.png 지금보니 캬바레라는 이름을 하고 있었다. 난 이제까지 그게 일본어인줄 알았는데.

길을 계속 걸어가다 보니 요트가 잔뜩 서 있는 해변가가 나왔고, 조금 걷다 보니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가 희미하게 들렸다. 내가 평범한 건물 지붕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알고 보니 클럽들이 줄지어 있는 번화가였던 것이다. 주변의 젊은 사람들은 전부 밤마다 이곳에 모여 놀 것 같았다. 나도 덩달아 흥이 나서 가게 앞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여행 가방이 마음에 걸려서 그만두었다. 촌티나는 관광객 같아 보이기도 하고 혹시 나쁜 사람을 만나 뭔가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529C0283-5E73-482B-8E37-49F0B9EB4B0B_1_105_c.jpeg 도착하고 나서 첫 숙소여서 그런지 정이 많이 가고 기억에도 남는다.

걸어오는 동안 잠시 쉬기도 하고 구경하느라 두 시간 넘게 걸린 끝에 숙소에 도착했고, 주인이 미리 남겨 놓은 메시지에 적힌 방 번호와 열쇠 위치를 참고해 들어갔다. 1층의 파란 문 방은 민박에 가까운 느낌이었고 매우 훌륭했다. 하루 내내 입고 있던 옷들을 모두 정리하고 씻은 뒤, 나는 노트북을 켜서 인터넷이 되는지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문명 세계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안부를 묻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잘 도착했다는 대답을 남기고 잘 준비를 마치자 시계는 새벽 3시가 지나 있었다. 이코노미석이나 소파가 아닌 침대는 굉장히 편안했다. 나는 곧 다가올 아침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매거진의 이전글2. 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