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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리누리 Nov 15. 2024

돌아온다는 거

2024. 11. 3




돌아왔다. 잠시 마감 없는 일상으로.


금요일 아침, 곧 출근을 앞두고 수요일 마감이었던 글을 여전히 붙들고 있었다. 전날 완성했는데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벌써 이것이 게재되었을 때 받게 될 비난만 그려져 넘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 내내 일정을 잡아두었기에, 그날 안에 어떻게든 끝내야 했다. 울면서 독서 모임에 SOS를 쳤다. 아침부터 염치없는데 진짜 주글 거 같아서 나 좀 살려줘……


죽지 말라며 아침부터 짧지도 않은 글을 읽어주고 공들여 응답해준 친구들 덕분에 좀 진정했다. “오래 잡고 있는다고 좋은 글 나오는 거 아닌 거 알죠? 본인 괴롭히는 에너지 아껴서 언넝 털어버리고 글감옥 탈출합시다.” “옳소! 누리 얼렁 보내버리고 밖으로 나와!” “오늘 수업 주제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그다음 흘려보내기’인데, 어쩌면 그게 붙잡던 무엇인가를 떠나보내는 일일 수도 있고, 중요한 건 ‘잘 보내주기’까지가 내 몫인 듯.” 정신이 점점 더 돌아왔다. 다정하면서도 냉정한 격려와 응원을 받으며 간절히 돌아가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맞아. 나 너무 오래 처박혀 있었어. 너네랑 놀고 싶어. 너네에게 돌아갈래!


저녁 모임을 한두 시간 앞두고 글을 제출했다. 밴드 연습이 있었다. 슬픈 노랫말을 불러야 하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밴드 모임을 마치고 뒤풀이에 갔다. 전주에서 시집 책방을 하는 친구 영업장의 식탁에 맥주와 막걸리와 안주가 차려졌다. 안주는 지역 환경 단체에서 활동하는 다른 친구가 그날 있었던 농성장에서 받아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술자리에서도 다음 마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분이 아직 낯설었다. 책방 운영과, 시민 활동과, 기록에 대해 각자 끌어안고 지내던 고민을 두서없이 주고받다가 문득, 이 모든 대화가 이렇게 조심스럽지만 솔직하게 이뤄질 수 있는 관계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눈앞의 두 사람을 생각했다. 그들의 고향은 이 지역이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전주가 좋아서 여기 정착하여 이곳에서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전주에서 태어나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십 대를 서울에 있다가 다시 전주 본가로 돌아온 나는…… 돌아 일 년 반 내내 다음 거주지만 고민했던 나는……


이제, 그만두고 싶다. 지겹게 반복되는 생각들.


나 전주에서 살고 싶어.


전주에 쭉 있고 싶은 거 같아.


전주가 좋아. 이 지역이 좋다. 이 지역에서 만나게 된 이들이 좋다. 그들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다.


여기 있으면 내가 나로서 살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온몸으로 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현재가 싫어서 자꾸 미래만 보는 줄 알았는데, 여기에서의 미래를 그리고 싶어서 현재를 더 잘 살아가고 싶고 현재에 더 살아 있고 싶은 거란 마음을 순간 마주했다.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실은 자주 미안했다고 털어놓게 되었다.


이곳을 임시 정거장처럼 생각해서. 내가 그렇게도 되기 싫던 소설 「무진기행」의 윤희중처럼,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 날만 그려서. 우리가 같이 있어 행복하던 순간에도, 여기를 떠나면 이 모든 것도 다 끝이라는 생각을 멈추지 못해서. 오히려 나보다 더 전주에 언제까지고 머물며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이 두 사람 같은 친구들, 혹은 이제껏 계속 전주에 살면서 태어난 지역에 만족한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자랑하는 친구들 앞에 있을 때면, 부끄러웠다. 나는, 나만 왜 여기서 지속 가능한 삶을 그리기를 두려워하는 걸까. 여기선 그 삶이 어려울 거 같다는 불안을 왜 못 떨치는 걸까. 왜 떠돌듯이 지내는 걸까.


본가와의 갈등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가족 관계 때문에? 이다음엔 또 어떻게 될지 모를 생계 때문에?


아니. 그건 지역의 문제가 아니잖아. 서울에 살면서도 그런 고민은 내내 이어졌잖아.


해결책은 거기에 없어. 여기에 있어. 지금 여기, 나에게 있다.


수도권 중심의 사고방식을 경계하자면서도 누구보다 지역을 타자화해온 속마음을 깨달은 순간, 문제는 거주지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어디에서든, 어디 가서든 살아갈 수 있다. 어디에든 삶이 있다. 어디에도.


나 떠나기 싫어.


너네랑 헤어지기 싫다고!


밤새워 놀고 싶었는데, 서너 시간 뒤 출근할 친구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해서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한 달간 집을 내어준 친구의 집으로. 거실에 불이 환히 들어온 순간 정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서 지내기 시작하고 보름이 지났을 무렵부터 자주 느꼈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갈 집이 있다고.


돌아가고 싶은 집이 있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여기가 진짜로 내 집도 아닌데. 본가에서도, 자취하던 집에서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마음이 어쩌다 찾아오기 시작했지. 처음에는 낯설고 무서웠던 그 기분에 어느덧 좀 익숙해졌다.


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집에 돌아와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차츰 커졌다.


먹고 씻고 자거나, 공부하고 일하고 운동하는 필수적인 일정을 위해서만 집을 쓰고 치우지 않고, 집에 머물며 쉬고, 웃고, 기분 좋게 늘어지는 생활을 하고 싶어. 집에서의 생활이라는 게 생겼다. 어제와 다른 식사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장을 봐오고, 해치우듯이 먹지 않고 천천히 맛을 느낀다. 음식을 두고 맛있다고, 혼자서도 더 맛있게 먹고 싶다고 느낀다. 친구가 아끼는 식물이 살아가는 화분들을 돌본다. 화분을 살피기 위해 베란다로 나가면 창밖을 보게 된다. 아름다운 하늘을 보면 뛰쳐나가고 싶어진다. 여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여기를 더 좋아하고 싶어서. 이제 곧 매일 볼 수 없는 동네에서의 하늘이라고 여기면 모든 순간이 소중해져서, 짧게라도 산책을 다녀온다. 아파트와 뒷산의 숲과 천변이 한 데 있는 곳곳을 돌아다닌다. 이쪽 천변에는 아직 전주천 난개발로부터 살아남은 버드나무들이 많다. 그걸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나무들이 사라진 천변에 대한 상실감에 더 기울어져 지냈는데. 나무들을 보러 나와서 나무들 속에서 걷거나 뛰고 있으면 살아 있다는 기분이 밀려온다. 살아 있다. 나무들도 살아 있고, 나도 살아 있다.


내가 여기서 살아가고 있다. 집에 다시 돌아오고도, 여기서, 이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울면서 마감하다가도 그런 틈을 느낄 수 있다. 틈을 누릴 수 있다. 일하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면서 일을 하고 있다. 일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고, 일과 별개로 존재하는 삶이 있다. 이 삶에 좀 더 있고 싶어서, 하루빨리 마감하고 놀러 다니고 싶다. 친구들에게로 돌아가고 싶다.


이 안에도, 이 밖에도 돌아오고 돌아갈 곳이 있다.


이 집에서 졸업논문 프로포절을 넘겼다. 그 논문은 평생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들을 꿈꾸며 물리적인 이동을 감행한 신여성들의 문제를 다룬다. 다만 몇 달 전까지는 집 밖으로 떠났다가도 또다시 집으로, 가정으로, 가족 관계로 돌아오려 하던 그들의 결말을 해석하기가 혼란스러웠는데, 최근에 다르게 고쳐서 넘길 수 있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제까지고 떠나있을 수만 없듯, 세 작가에게서 나타난 귀환의 양상도 당대 여성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 떠나고 돌아오는 단선적 구도로 보지 않고, 그 과정의 틈새에서 확장되는 여성들―되기의 길로 살피고 싶다. 그것이 곧 여성이기에 실패하면서도 여성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의 여정이었음을……” 그렇게 글을 마무리하며 생각했다. 그토록 떠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그토록 떠나게끔 만든 이유가 달랐다면, 끊임없이 떠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들이 떠나고자 했던 이유는, 더 이상 떠나지 않아도 괜찮은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큼, 돌아오고자 한 마음도 그들의 욕망이고, 진심이다. 정신적인 이동이다.


그 곁에서 나도, 이제 며칠 뒤면 떠날 이 집 이후의 미래를 그리게 된다. 다시 본가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몇 달 뒤에 독립할 집을 구하기까지 당분간 또 거기에 있게 되더라도, 그 이후를 그려보게 된다. 더 이상 숨 막히지 않는 집.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집. 나만 숨 쉬는 게 아니라 함께 숨 쉬며 살아갈 화분을 둘 수 있는 집. 화분과 함께 살 수 있는 집. 살아 있고 싶은 집. 오래오래 미워하고만 싶지 않은 집.


물을 너무 많이 준 식물의 잎사귀가 말라버렸을 때, 친구는 그 부분만 잘라주면 된다고 나를 타일렀다.


이 집이, 한 달간의 이 생활이 내게서 떨어져 나간 뒤에도 나는 괜찮을 수 있을까.


괜찮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럴 수 있을 거 같다.


지금처럼 돌아올 수 있다면. 어디로든. 누구에게든.


평생 그리워했던, 그토록 찾아 헤맸던 삶의 미래로, 돌아오고 있다.






* 신여성 작업실 글쓰기 워크숍 <소리내어 글쓰기 : 마음의 누수> 에서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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