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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리누리 Apr 24. 2023

누리는 누리를 누리고 싶었더니만

-나의 탄생 설화 : 내 이름은김누리




“남자 복이 없네.”


그녀의 취미. 사주 보러 가서 저는 언제쯤이나 연애할 수 있냐고 묻기.


“남자 만날 운을 일복으로 다 갖다 쓰거나, 헛것들만 만나서 버리고 있어.”


여기서 헛것이란, 화면 저편의 남자들. 요컨대 그녀가 덕질하는 이들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취미는, 당분간 연애 생각이 없는 건 물론이고, 남자 만날 필요는 더욱이 느끼지 않으면서도 꼬치꼬치 캐묻기.


“이런 게 전형적인 남자 사주야. 남자로 태어났다면 기막히게 성공해서 잘 먹고 잘살았을 텐데, 쯧. 안타깝게 됐네. 남자랑 엮이면 오히려 꼬일 인생인데, 지금은 사귀는 남자 없지?”


애초에 남자가 붙는 인생이 아니라는 사주를 듣고 나면 역시 이대로 사는 게 옳다고, 인생이 피곤해지는 남자관계로 아까운 청춘을 허비할 바에야, 계속 혼자 우렁차게 살아보자는 근거가 생기는 기분이니까.


그렇게 매년 소문난 사주쟁이들을 찾아다니고, 연애로 울고 웃는 친구들 따라 어디서 어떤 타로를 뽑든 신기하게도 거기서 거기인 답만 듣게 되면서 그녀는 비혼, 비연애, 독신주의로의 새해 다짐을 매번 갱신했다. 그러다 어느 해부터 발길을 끊었다. 문득, 다 같은 인간의 사주인데 굳이 남성이니, 여성이니 구분하여 그녀의 생을 예견하는 소리가 낡고 지루하다고 느꼈다. 이미 첫 사주를 보러 다니기 전부터도 혼자 좆대로 잘 살아왔으니, 큰돈 내고 미래 아닌 과거만을 복기한 셈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운명론자를 지양하는,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이며, 설마 운명이 있더라도 운명을 거역하려는 운명을 좇고자 하니까. 오히려 자꾸 미래의 연애를 되물을수록 언젠가는 연애해야 한다는 미련을 남겨두는 것 같아 자존심도 좀 상했다.


다만 ‘남자 사주’라는 말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출생을 둘러싼 태몽에서부터 비슷한 기미가 일찍이 점지되었다는 얘기를 어릴 적부터 끈덕지게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그녀의 어머니가 꿈을 꿨단다.


“옛날 옛적에 모산 외갓집 마루에 있던 토방 기억나니? 어느 날 내가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더니, 토방에 구렁이보다 훨씬 크고 공룡인 듯도 하고 용인 것도 같은 거대한 생물이 떡하니 앉아 있었어. 처음에는 잔뜩 겁먹었는데, 묘하게 달팽이를 닮은 얼굴이 귀엽고 온화하게 보이더라. 어쩐지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아 슬슬 다가갔더니, 걔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는 거 있지? 그리고 ‘쎄쎄쎄’ 있잖아. 나랑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얘기하면서 글쎄 나랑 쎄쎄쎄를 하더라고. 그러고 나서 뱃속에 생긴 네 소식을 들었지.”


덕분에 어머니는 그녀가 남자애이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주변에서도 용이라니! 보통 사내애도 아니고, 장차 큰일을 해낼 아주 장군감인 모양이라고 들뜬 목소리로 부추겼다. 소위 딸의 태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었으니까. 도중에 하혈하여 아이를 잃을 뻔한 시기를 무사히 이겨냈을 때도, 역시 장사처럼 튼튼한 사내애라 잘 견뎌줬다 싶었다. 태아의 성별을 미리 판별할 의학 기술을 이미 갖춘 무렵이었지만, 그로 인해 여아 살인을 당연하게 저지르는 흉흉한 낙태 수술이 마구 성행하면서, 의사가 미리 태아의 성별을 알리지 못하도록 막는 국회법이 통과한 직후였다. 그래서 가랑이를, 아니지, 제왕절개로 낳았으니 뱃가죽을 찢고 그녀가 응애 울음 터뜨리며 나오던 순간까지도 어머니는 몰랐다.


“축하합니다. 여자애입니다.”


어머니는 도무지 의사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선생님, 한 번만 다시 봐주세요. 참말로 여자애라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어머니가 말끝을 흐렸듯이, 그녀도 종종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살아 있었을 리 없었을지 모른다고. 여자애라는 이유만으로 이름도 갖지 못한 채 뱃속에서 죽어 나오던 핏덩이들의 시대였으니까. 만약 토방에 용이 아니라 산토끼가 앉아 있었다면, 비늘 대신 하얀 솜털로 뒤덮인 손이 쎄쎄쎄 반겨줬다면, 그녀는 지금쯤 이 세상에 없었고 이 글 또한 쓰이지 못했을지 모른다. 물론 태몽에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지만, 사내애인 줄 알았는데 계집애가 태어났다는 비보에 외할머니가 한동안 그녀를 미워했고, 그녀의 남동생이 태어난 뒤로는 그녀가 더 안쓰럽게 시달린 시기가 있었다는 말을 훗날 전해 들은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되지 않는 그 허무맹랑한 꿈이 그녀를 살려냈던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정확한 속사정은 몰라도 그녀의 김 씨 세대에 같은 성을 가진 여성이라고는 오로지 그녀 하나뿐이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소원이 있다. 무사히 김 씨 가족으로 살아남았다면 죽어서도 이 집안의 땅에 묻히고 싶다고. 기일과 명절을 맞아 돌아가신 조부모의 묘에 찾아가 그리 말하면, 어른들은 어디서 눈깔을 시퍼렇게 뜨고 벌써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냐고 닥치라 꾸짖었다. 이년아 말도 되지 않는 소리 마라. 썩 집어치워라. 너는 네 사위네 찾아가서 그쪽 묘에 묻혀라. 그게 세상의 이치다. 이 지긋지긋한 레퍼토리로 수년째 입씨름이 이어지고 있다. 그녀는 죽은 가족의 상주로 있을 수 없는 현실에도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간 살가운 적 없던 남동생이 단순히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영정사진 가까이에 앉아 손님들을 받을 수 있었고, 그녀는 바깥에서 음식이나 나르고 안에서 오랫동안 무릎 꿇고 있는 남자들을 위한 파스 심부름 따위를 도맡아야 한다는 빌어먹을 위치를 내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진짜 좆나! 화가 났다고!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반드시 상주를 서겠다고 말했다가 역시 또 혼났다. 그래도 그날이 오면 부모가 저승을 치고 통곡할지언정 그녀는 갖은 수를 써서 꼭 그러고야 말 것이다.


‘세상의 이치’라니 말인데, ‘누리’라는 이름을 새삼 자각할 때면 그녀는 더 두고두고 포기할 수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에게만큼은 항렬을 물려주기 싫었다고 한다. 자기와 형제의 이름에 ‘형’이 들어간 것처럼, 아들 세대의 형들이 돌림자로 나눠 가진 ‘정’을 내팽개치고, ‘찬영’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까닭이다.


그녀는 남동생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솔직히 꼴도 보기 싫어하지만, ‘찬영’이라는 이름은 흔하지도 않고 꽤 괜찮다고 자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그녀는 ‘누리’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학창 시절에는 그러지 못했다. 초등학교 교가 가사에 ‘온누리’가 들어가서 교가 부르는 시간마다 놀림감이 되었고, 기껏 졸업했더니 무슨 교가들이 하나같이 몰개성한지 중학교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던 상황이 지지리도 지겨웠건만, ‘누리’가 ‘세상’을 뜻하기에 노래로도 불릴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세상을 품은 자신의 이름이 지금은 마냥 좋다. 최근에는 ‘누리’라는 인간들도 널리고 널렸는데, 한때는 주로 ‘개’의 이름으로 쓰였던 만큼 둥글둥글한 이름이 참 좋다. 그녀는 개도 좋아하니까. 개 같다는 표현이 어떻게 해야 칭찬으로 들릴지를 고민한다.


게다가 ‘찬영’이라는 이름보다 ‘누리’라는 이름이 극적으로 지어졌단다.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순우리말로 짓고 싶었다. 당시에 그는 신문 기자였고, 첫 자식에게 당찬 이름을 주고 싶어 사내 동료들에게 두 당 두 개씩 이름을 받은 결과 누리가 꼽혔다. 이 에피소드를 듣고 그녀는 이름을 훨씬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찝찝한 구석도 있긴 하다. “왜 동생에게는 순우리말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어요?” 물었을 때, 돌아온 아버지의 대답. “그래도 남자애는 무게감 있는 한자 이름을 가져야 듬직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또 물었다. “그렇다면 제 이름이 ‘정연’이가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어쨌거나 저도 항렬을 따라야 했을 테니까요.” 정연이든 정은이든, ‘정’이 들어가는 이름보다는 누리가 만족스럽고 너무너무 좋아 그냥 던진 우스갯소리 같은 질문이었는데, 답변은 뜻밖이었다. “아니. 너는 항렬과 상관없었어. 여자애니까.”


여자애니까.


여자니까.


여성이니 따르지 않아도 된다.


무엇을? 항렬을.


이 집안의 혈족을.


그녀에게는 그것이 ‘출가외인’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게 들렸다.


성씨가 그대로 있는데도, 이 사랑스러운 이름을 가졌는데도, 순간 호적에서 영영 파여버린 기분이었다.


아직 ‘누리’라는 이름이 창피했던 사춘기 시절, 사차원 소리를 듣기를 즐기면서 그녀는 이름이 이름이고 싶었다. 내 이름은 이름이에요! 반쯤 농담처럼 자랑할 수 있고 잊히지 않을 특별한 이름을 갖고 싶었다.


그랬는데. 도대체 이게 뭐냐, 지금은?


글쎄……


‘김누리’가 아니라 ‘김강누리’나 ‘강김누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호주제가 폐지되었으니, 시류에 맞춰서 개명하고 싶다고. 나도 다른 멋진 여성들처럼 개명해보면 어떨까, 잠깐 진지하게 고민했다.


결국 바뀐 건 없었지만…. ‘누리’라는 좋은 이름에 흔하디흔한 ‘김’씨가 붙자 시시해졌는데, 그만큼 뻔한 ‘강’까지 묻으면 너무 본새 나지 않으니까. 용처럼 살게 될 거라더니 그저 그런 개천이 된 인생이 여기서 더 진흙탕처럼 되어버릴까 두려워서. 세상에 버금가는 이름만큼 그녀는 여전히 큰 그릇이 되고 싶으니까.


사주도 태몽도 거절한다고 떵떵거리지만, 그녀도 이름에 쩔쩔매는 별수 없는 구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구식이야.


이 꼰대!


청년 꼰대가 아재보다 지독하다더니!


몇 년 후면 청년도 아니고, 그냥 순도 꼰대!


그녀는 요즘도 드문드문 ‘남자 사주’의 운명을 곱씹는다.


아니. 그럴수록 남자처럼 살기 싫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멍청한 가부장의 권력을 좋다고 행사하는 남자들처럼 되기 싫다.


그녀는 그저 세상으로 남고 싶다. 세상에 태어나 자꾸 세상을 가로질러 싹틔우는 자유로운 세상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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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글방 에서 재미있는 주제를 받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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