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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리누리 Jul 24. 2023

당신의 방을 내 영원한 실패로 채울게요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할머니’라는 사람이 울음 버튼이 되어버렸다. 길거리에서 채소를 파는, 폐지와 고물을 줍고, 무거운 짐을 끌고 다니는, 거동이 어려워 보행기에 의지해서 천천히 걸음 딛는 당신들을 보면, 한동안 바로 울어버렸고, 이제는 그래도 울컥울컥 참게 되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와르르 울고 싶다.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저리 지냈을까 싶은 아쉬움, 그랬다면 너무 고되었으리라는 서러움 따위가 막 뒤섞인 심정으로 한참 지켜보다 서둘러 그친다. 너, 그리 남을 함부로 울음 거리로 삼으면 안 된다는 죄책감에.


언젠가 <집의 시간들>이라는 영화를 봤을 때도 그랬다. 오래전이라 내용을 대부분 잊었지만, 재건축을 앞뒀던 둔촌주공 단지의 정자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르신이 편히 쉬어갈 정자와의 안녕을 고하는 장면에서 또 할머니가 겹쳐 보인 것이다. 할머니가 끝으로 지냈던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정자가 없었다. 그래서 정자가 곳곳에 많았던 다른 단지에서 이사를 오고부터는 집을 오갈 때 바깥에서 동무들과 도란도란 어울리는 할머니를 보기 어려워졌고, 할머니도 자주 적적하다고, 여기는 예전 집과 달리 창밖 풍경도 삭막하다고 푸념했다. 그즈음 나는, 평수가 넓어진 집에 드디어 내 방이 생겼다고 마냥 좋아했는데. 영화를 보고 아빠에게 전화해 이러한 생각을 했다는 말을 꺼내자, 아빠는 어차피 그 무렵의 할머니는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아 외출하기가 어려웠다고 답했다. 물론, 그 말도 맞았다. 언제부턴가 가족 여행을 떠날 때면 할머니는 집에 있겠다고 했고, 나도 점점 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으니까. 여행에 가서도 종일 할머니를 챙기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는 몹쓸 안도감도 가졌지. 그렇지만, 할머니가 나갈 수 없다는 것과, 외출하고도 머무를 데 없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지 않았을까.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할머니가 대체 어떤 마음으로 홀로 기다렸을지 조금도 가늠하지 못하겠다.


내가 태어나고부터 줄곧 길러주신 할머니는 2019년 4월에 돌아가셨다. 나는 어린 시절 부모님보다 할머니의 방에서, 할머니 곁에서 자는 게 편하고 익숙했다. 맞벌이 부모 대신 종일 살을 붙이고 지낸 할머니와 훨씬 친밀했으니. 어느 날 엄마가 같이 자자며 나를 데려갔던 밤에도 내가 낯설고 불안해서 잠 못 이루다가 결국 징징거리며 할머니에게 돌아왔는데, 서운해하던 엄마는 무서우면서도 할머니가 맞아주고 안아준 순간이 벅찰 만큼 좋았다. 허리까지 길었던 내 머리칼을 매번 귀찮지도 않은지 어여쁘게 빗기고 땋아주던, 아이에게 어울렸든 아니든 당신이 들일 수 있는 정성을 다해 내 볼과 입술에 연지곤지를 찍어 발라주던, 몹시 거친데도 신비하리만큼 따듯했던 손에 길들은 시절. 어릴 적부터 곧잘 배앓이했는데, 할머니가 약손으로 문질러주면 금방 괜찮아져 마법 같았던 기억이 요새도 생생하다. 요즈음도 위와 장이 아파서 알약을 삼킬 때, 어떤 명의도 비할 데가 될 수 없는 당신의 손길이 문득, 자꾸 그립다. 투박해서 더 맛있었던 당신표 콩가루 비빔밥과 온갖 부침개를 한 번만 더 맛보고 싶다.


2018년 늦가을, 서울에서 자취하며 온갖 마감에 치여 지내다 처음으로 당신의 생일을 하얗게 잊었고, 통화로 뒤늦게 축하를 전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괜찮다고, 건강히 잘 지내냐고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고 내 안부만 묻기 바빴던 할머니. 머잖아 초겨울이 되어 당신의 갑작스러운 입원 소식과 시한부 선고를 전해 들었을 때는, 평일에 내내 조교로 일하고 주말에도 식당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중요한 가족사니까, 사정을 말하고 한 번쯤 빠지면 되었는데. 당신 상태보다 눈앞의 가게 사정을 더 챙겼던 불효녀의 빌어먹을 책임감만 앞세우다 결국 종강하고서야 병원에 갔다. 그런데 나를 마중하러 힘겨운 몸 끌고 복도까지 나와 있던 할머니가 마주 서자마자 이런 꼴이나 보여 미안하다고 울기 시작했고, 나는 당황해서 괜찮다고, 괜찮다고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누워있는 할머니를 지키며 둘이 한참 얘기를 나눴다. 아무래도 밝은 얘기가 필요할 테니, 아빠가 주고 간 옛 사진첩을 들추며 일부러 어린 시절 기억만 꺼냈다. 이를테면 내가 친구 토끼를 하루 키워주려 집에 데려온 날 할머니가 지독한 똥 냄새에 고생했다는 따위의, 현재와는 전혀 이어지지 않는 시답잖은 과거의 순간들. 그토록 단절적인 추억 여행이었는데, 오직 추억만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 십 대가 되고, 더욱 이십 대에 상경하여 집을 떠나있고부터 할머니와 나눠 가진 좋은 추억이랄 게 거의 없었으니. 오히려 자주 싸웠다. 휴일을 맞아 고향에 갔다가도 자꾸만 밥을 더 먹으라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담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짜증 냈고, 아침이고 밤이고 엄마와 싸우는 할머니 사이에 껴들어 소리를 빡빡 질렀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부터 할머니가 며느리인 엄마에게 너무한다는 새로운 감각이 앞서게 되면서, 평생 미웠던 엄마를 더 이해해보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나를 향한 분노에 급급해 정작 할머니 세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충분히 헤아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정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시간을 보냈던 적이 최근에는 없었으니, 그날 내내 나란히 웃으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 내게 지금 여기서 뻔뻔하게 이러고 있을 자격이 있을까? 뒤늦게 착한 손녀 역할을 연기하는 듯한 내가 몹시 혐오스러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래 앓은 까닭은 그 때문일 거다. 방학 근무를 최대한 당겨 마친 뒤 한 달간 고향에 돌아와 있었지만, 방학 중 졸업논문 초안을 끝내야 해서 할머니의 곁에는 조각조각 쪼갠 시간에만 머물렀다. 와중에 할머니가 온전히 정신을 지키던 날은 점차 짧아졌는데, 마지막으로 당신이 우리를 알아볼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에도 나는 반성할 줄 모르고 아주 엉망진창으로, 끔찍이 실패했다. 당시 학부생들이 저질렀던 사고의 뒷감당을 조교라는 이유로 내가 혼자 떠맡게 되어 비근무 시간에도 개의치 않고 오는 온갖 연락에 시달리고 있었고, 하루에 몇 시간만 가능했던 짧은 병문안 동안 또 한 학생에게 전화가 온 것이었다. 나는 아마도 거의 십 분간… 한 손으로 전화기를 잡고 귓속으로 쏟아지는 학생의 분노에 찬 막말을 들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할머니의 바짝 마른 손을 붙잡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내 탓을 하는 학생에게 당장 그게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영문 모른 채 의아해하면서도 내 손을 이리저리 쓰다듬고 있는 할머니에게 괜찮은 척 보이기 위해 최소한의 반응만 하며 통화가 더 불필요하게 길어졌다. 할머니와 자유롭게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그리 허망하게 가버리고, 아니 내가 멍청하게 잃어버리고, 병문안 시간은 끝났다. 언성 높았던 학생의 목소리가 들린 건지 무슨 일이냐며 걱정스레 묻는 할머니에게 별일 아니라고 웃고, 내일 다시 오겠다고, 문밖을 나섰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마자 그대로 문 앞에 주저앉았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두고두고 후회했다. 두고두고 나를 미워하며 할머니가 떠나버린 가운데 더 이상 살아 있고 싶지 않았다. 별일 없었다는 듯 조교라는 이름을 걸고 학교에 나가기 싫었다. 앞뒤 다르게 처신하는 학생을 보고 싶지 않았다. 모두의 마음을 돌봐달라 부탁했으면서 내 마음은 물어주지 않은 선생님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누구도 보기 싫었고, 그런데 그 모두를 하염없이 원망하는 나를 가장 보기 싫었다. 그래봤자 네 선택이고 결정이었잖아. 주변에서 끊임없이 말렸는데도 지나치게 자처해서 짊어진 무게잖아. 사실 그까짓 거! 내 탓도 잘못도 책임도 내가 나서 해결할 일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던 일도 아닌데! 몸과 마음 갈아가며 이리저리 뛰어봤자 소용도 없던, 애쓰면 애쓸수록 구렁텅이로 썩어버리던 책임감 따위가 다 뭐라고!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전화를 받아도 되었는데! 다음에 통화하자고 거절해도 되었는데! 생판 남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며 네 평생을 사랑으로 살펴준 할머니는 그따위로 무심히 방치했어?


오랫동안 만신창이로,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살아 있었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내 의지로 할머니에게 충분히, 최선을 다해 집중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할머니가 떠나고도 이 년 가까이, 며칠 걸러 당신이 이 집에서 떠나지 않는, 떠나지 못하는, 떠날 수 없는 꿈을 꿨다. 처음에는 당신이 어딘가 누워있거나 벽에 기대어 움직이지 못하고 꼿꼿이 앉아만 있는 꿈이었다. 다시금 곧 돌아가시기 직전이었고, 그럼 나는 할머니가 조용히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라도, 당장이라도 떠나게 될 줄 알고 있어 이 시간이 거듭 끝나간다는 게 너무 두려웠다. 다음에는 또다시 떠나간 할머니가 내 앞에 줄곧 나타나는 꿈을 꿨다. 그런데, 내게만 보였다. 다른 가족에게는 보이고 들리지 않았다. 나는 분명 할머니와 시시콜콜하게 떠드는데, 이 사실이 너무 이상해 꿈속에서도 정신과에 가니 의사가 환상통이라고 진단했다. “선생님, 사람이 통증이라니요. 사랑하는 사람이 헛된 감각이라니요.” 이는 그 시기에 다른 일기에 써둔 문장이고,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의사가 도리어 미친 줄 알았다. 실은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현실을 부정하던 내가 속수무책으로 미쳐가던 시기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모두가 환상통을 앓게 된 것처럼 할머니를 느꼈다. 가족과 친척도 나처럼 당연하게 할머니와 생활하고, 할머니는 산 사람처럼, 살아 있을 적처럼 빈집을 지키다 귀가하는 우리를 맞아줬다. 그간 나를 미친년 취급하며 재수 없는 쇼 말라던 저들에게 어이가 없어 꼬치꼬치 캐묻자, 마침내 드러난 진실.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관과 묘지를 꾸몄다고. 할머니는 앞으로 평생 죽은 신분으로 이 집에서 외롭고 지겹게 숨어 살아야 한다고. 이에,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버럭 화내고 길길이 날뛰던 꿈을 마지막으로, 기나긴 악몽이었을까 혹은 그렇게라도 할머니를 더 보게 되어 다행이었는지도 모르는 혼몽이 끝났다. 매번 울다가 잠에서 깨고 나면, 할머니를 고작 희미한 통증으로 흐리는 꿈이나 지어내는 듯해 죄스러웠던 날들. 내가 감히 뭐라고 사랑하는 당신을 추상에 짓이겨? 정작 넌 통증을 느낄 자격도 없잖아. 아파할 자격도 없잖아. 울면서도 슬퍼할 자격 없다고, 가식적으로 굴지 말라고 고래고래 악을 썼는데. 최근에도 아주 간혹 할머니 꿈을 꾸지만,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만나고 일어난 날이면, 방금까지 같이 있었던 당신조차 긴가민가 싶어지는 상황이 과연 맞는지 묻게 된다. 내가 더는 할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아서 꿈을 꾸지 못하는 걸까. 꾸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시간이 흐르면 심정에 변화가 찾아오고 애도하는 방식도 바뀌기 마련인데, 나는 나를 아직도 용서할 수 없다.


할머니가 떠나던 해를 열었던 신춘문예에서 처음 최종심에 올랐다. 핸드폰 케이스에 마감일을 써둔 메모를 꽂고 다닐 만큼 내가 유일하게, 간절하게 등단을 꿈꾼 해였다. 스스로 작가로 살고 싶어 등단 작가가 되고 싶었다기보다, 오래도록 내가 작가가 되기를 바란 할머니의 소망을 이뤄주고 싶어서. 다음 신춘문예까지 기다리기에는, 할머니가 기다려주기 어려울 테니까. 그렇지만 당선 확률은 너무나 까마득하니 혹시 가짜 당선증이라도 만들어 거짓 행복을 선물한다면, 아무리 악의 없는 짓이라도 그건 범죄겠죠? 아빠에게 조심스럽지만 진지하게 제안했다가 단연 거절당하고, 며칠간 기적이 일어나기를 손꼽아 바랐다. 그리고 결코 세상은 쉽지 않았지만, 할머니 덕분에 새해 첫 신문에 이름이 오르다니! 내가 언급된 심사평을 커다랗게 인쇄해가서 할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쩌렁쩌렁 읽어드리며 일부러 온 병실에 다 울리도록 자랑했고, 할머니가 종이를 계속 꼭 붙들고 있던 모습에 뿌듯했다. 그냥,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청소년기에 운 좋게 책으로 냈던 청소년소설이 있는데, 그때의 내 글들은 죄다 몹시 어두웠다. 문예창작학과의 존재조차 모르던 인문계 고등학교 한가운데서 소설 쓰려는 나를 기꺼이 응원해주던 친구들도 우울한 내 소설만은 꺼렸을 만큼. 그러다 어느 날 할머니 방에서 내 책을 발견하고, 혹시 읽었는지 물었다. 그러니 돌아온 답. 내용이 슬프고 가슴이 아파 첫 부분만 읽다 더 못 읽었다고. 결국 읽힐 수 없는 책이라는 말이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 감상을 가장 좋아한다. 수없이 곱씹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책에 대한 감상평 중 제일 큰 위안이 된 한 마디로 남았다. 그렇다면, 어쩌면 나는 할머니에게 내가 더는 아픈 글만 쓰지 않는 손녀로 자랐음을 떳떳이 보여드리고 싶었나. 이제 소설은 쓰지 않더라도, 대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힘껏 사랑하려는 마음을 쓰고픈 내 글을 예전보다 아낄 수 있게 되었다고. 지나간 기록들에 내가 위로받기도 한다고. 앞으로도 그런 글을 쓰겠다고. 세상과 싸우더라도, 사랑하니까 싸우는. 고단하고 곤란한 사랑조차 끌어안고 돌보며 기꺼이 함께 이겨내리라는 글을. 올해 초 제주에서 지낼 때 자꾸 할머니들이 쓴 그림책을 찾아다니고, 그런 책들을 기적처럼 발견한 날이면 하늘이 어둑해지도록 책방에 머물렀던 까닭도 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서울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온 뒤 할머니가 쓰던 작은방에서 생활하고, 매일 밤 할머니가 남기고 간 침대에서 잠든다. 이 방에 오면, 언젠간 꼭 용서를 빌고 싶었다. 빌기만 하고 받기는 싫었다. 당신이 내내 그리워했던 예전 집에서 아직 내 방이 없었던 시절, 큰방을 혼자 쓰는 당신이 괜히 미워서, 만약 당신이 사라지고 부모님이 당신의 방을 쓰게 되면 나도 부모님의 자그마한 방이나마 가질 수 있을까 철없는 바람에 빠진 적이 있어요. 지금 사는 집에 이사 오고 부모님이 큰방을 쓰고 당신이 작은방을 가져간 게 옳다고 여긴 저를, 늦었지만 혼내주세요. 아주 혼나더라도 많이 보고 싶어요, 할머니.














최근 들어 재차 여러 죽음을, 서로 비할 수 없이 크고 깊은 슬픔을 접게 됩니다. 주말에는 감사한 지인 가까운 누군가의 장례식에 갑작스럽게 다녀오게 되었는데, 억지로 넣으려 해도 밥이 넘어가지 않고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갑갑해서 다시 이 글을 꺼냈습니다. 올해 초 쓰기 시작, 당시 소중한 사람들과 초고를 눠 읽 울면서 마음이 꽤 씩씩해진 줄 알았는데, 이제 같은 마음으로 울지 않 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어렵. 혹시, 더 고쳐 쓰면 괜찮아질까. 그간 마음이 더 아문 시간까지 담아내고 나면 괜찮아질까. 더 넓은 세상에 고해성사하면 괜찮아질까. 늘 그렇듯 내일이 용기가 사라질  고민하다가 올리지만, 사실 괜찮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쓸 수 있게 되고 말할 수 있게 되면 마음이 크게는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요즘은 확신한다고 고백하기가 더 두렵고.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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