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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눈썹 Apr 24. 2023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화장실에 적혀있는 글귀들로 그 장소를 마련한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고전적인 문구. 은근한 압박이 느껴진다.

'생리대가 급히 필요하다면 카운터에 요청해주세요' 주로 영화관이나 백화점 같은 장소에서 배려하는 말.

'휴지 외 물티슈 등을 넣고 물 내리지 마세요. 역류하면 직접 해결하셔야 합니다. 제발!!!!'

직원의 격무가 공감되는 한편 화장실을 쓰기가 두려워진다.



주 3회 출근하는 H특수학교 교직원 거울에는 큼직하게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라고 적혀있다. 학생들 거울에도 저렇게 써있다면 참 좋겠다 생각하며 기분 좋게 화장실을 사용한다.


우리 반이 아니면 옆 반에서, 아니면 윗층에서 매 시간 크고 작은 사건이 있다. 교실은 울고 화내는 소리, 싸우는 소리, 장난치는 소리로 소란스럽다. 종이 치면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양쪽에 데리고 복도로 나온다. 부모님이나 스쿨버스가 기다리는 학교현관으로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이 마지막 일과다. 저학년 학생들의 신발을 갈아신겨주고 부모님께 폭 안기는 모습을 보고 기분좋게 교실로 돌아간다. 하교하는 길에도 어떤 학생은 바닥에 누워 버티고, 소꿉놀이에 꽂힌 친구는 장난감에 시선이 뺏긴 채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장난꾸러기들을 데리고 혼자 고군분투하는 선생님을 지나가는 다른 선생님들이 돕는다.


이 학교는 초등 저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있다. 오래 근무하신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계속 지켜볼수 있다. 오랜만에 옛 제자를 만나면 '00아 안녕. 많이 컸네~'하고 인사하기도 한다. 학생들과 하이파이브 하며 '00야 잘가~ 내일 만나' 한다. 한바탕 하교잔치를 끝내고 한숨을 쉬며 터덜터덜 걷는 선생님들끼리 '수고하셨습니다' 하며 서로 응원한다.


이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을, 선생님이 선생님을 존중하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수업시간에도 아이들을 채근하기보다는 기다려주고 마음을 알아주려는 분위기가 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는 일은 너무 힘들다. 자기 발로 찾아와도 힘든 일인데 어른들 등에 떠밀려 학교에 오는 아이들은 오죽할까? 그 시간을 버티기 위해 학생들은 각자 나름의 방법을 찾는다.


화요일에 만나는 학생은 은우, 수진, 재영, 주아, 지호로 총 5명이다.


은우는 키가 크고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얼핏보면 성숙한 듯 싶지만 말하는 걸 보면 순 아가다.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간다는 걸 알고 창문 앞에 서성이며 '아빠한테 가자~ 아빠한테 가자~' 말한다. 미성으로 방긋방긋 웃으며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스르르 녹는다. 그 얇은 목소리로 특정한 패턴이 없이 갑자기 '우엥~~'하고 소리를 질러 친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는 하지만...


은우가 소리를 지르면 수진이는 황급히 귀를 막는다. 수진이는 고집으로는 우리반 1등이다. 코 앞에 다가가 '같이 하자~ 같이 하자~ 할 때까지 안 가야지~' 하고 버텨도 끝내 외면한다. 수진이에게는 특출난 재능이 있다. 바로 춤과 노래이다. 듣기 좋은 음악이 나오면 둠칫둠칫 몸을 씰룩대다가 벌떡 일어나서 빙글빙글 돌며 춤춘다. 수진이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천사 같아서 깜짝 놀랐다.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수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자주 불러준다.


재영이는 숫자 쓰기, 알파벳 쓰기,블록으로 공룡 만들기를 좋아한다. 디테일을 중시하여 그림 그릴때 요청하는 도구도 구체적이다. 원하는 재질의 사인펜, 필요한 사이즈의 종이를 얻을 때까지 강력하게 주장한다. 엄지를 쌍으로 들고 '재영이 정말 잘했어! 최고 최고!'이렇게 말하면 나를 따라서 엄지를 들고 '최고 최고!'말한다. 다른 친구들은 칭찬 받으면 어리둥절한 표정인데 재영이는 당연한 표정이다. 자기가 귀여움 받는다는 걸 잘 안다.


주아는 그림을 잘 그린다. 악기 연주도 곧잘 하지만 그리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처음에는 수업을 시작해도 책상에 엎드려 있거나 혼자 그림만 그렸는데, 이제 조금 편해졌는지 내 손을 끌어 얼굴에 덮고 냄새를 맡기도 한다.


지호는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간다. 만져보고 싶은 악기가 있으면 허락없이 손부터 내밀고, 악기를 연주하기보다는 관찰하는데 더 흥미를 느낀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노는 걸 더 좋아한다.


오늘 은우와 재영이가 싸웠다. 체급으로만 보면 은우가 압승일 것 같지만, 그는 사실 우리반 최고 겁쟁이다. 반면 재영이는 카리스마로 제일이다. 은우는 친구를 툭툭 치며 장난치는 습관이 있다. 오늘도 다른 친구들은 '쟤 또 시작이네'이런 식으로 째려보고 넘어갔는데 재영이는 크게 분노했다. 불씨는 은우가 지폈지만 재영이가 큰 불로 키웠다. 은우는 "으아아아앙~" 우는 척 하며 보조 선생님 뒤에 숨었다. 재영이는 작은 몸을 날리며 은우의 팔을 세 대정도 때렸는데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계속 허공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으이구 은우야 장난도 사람 봐가면서 해야지... 어설프게 싸우는 둘이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씩씩거리던 재영이는 더이상 은우에게 보복을 하지 못한다는 걸 인식하고 이제는 선생님에게 마음을 위로받으려 했다. "선생님 아파요 아파요 호 해주세요"했다. 보조선생님과 돌아가면서 목에다 호~ 하고 불어줬는데 목에 빨간 자국이 나 있었다. 은우는 겁이 많아서 친구를 세게 때리지 못한다. 더구나 재영이 자국을 보니 툭 쳐서 생긴 자국은 아니었다. 화를 내며 재영이가 자기 목뒤를 긁었는데 그때 생겼나보다.


학기초에 방과후부장 선생님께서 주신 지침이 있었다. 학교에 와서 다친 학생이 있으면 꼭 사진을 찍고 부모님께 바로 확인시켜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픔에 대해서 의사표현을 정확히 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기 때문에 부모님과 긴밀히 소통할 필요가 있다. 수업이 후 재영이 아버지께 오늘 일을 말씀드려야 했다.


재영이 아버지는 나보다 10살 정도 많아 보인다. 재영이처럼 피부가 희고  웃는상이다. 재영이가 아버지를 만나서 반갑다고 막 달려나가면 "선생님께 인사드려야지."하는 젠틀한 분인데 오늘은 기대하면 안되겠지? 날이 더워서 그랬는지 재영이 아버지는 흰색 민소매 차림이었다. 이날 아버님 얼굴을 가까이서 처음 봤다. 웃상은 웃상인데 왠지 해맑은 웃음은 아닌 거 같다. 어떡하지. 재영이의 기운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나보다.

  

나 : 안녕하세요 아버님. 말씀드릴게 있는데요. 오늘 재영이가 저희 반 친구랑 조금 싸웠어요. 그 친구가 툭 건드렸는데

재영 아버지 : 그 애 이름이 뭔데요?

나 : (누군지 말하면 왠지 안될거 같다...못들은 척하자...)재영이가 화가나서 자기 목을 긁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빨갛게 됐어요.

재영 아버지 : 피멍이 들었네요?

나 : (그 정돈 아닌데^^;;;;) 피멍은 아니고요. 저희가 연고는 발랐는데 놀라실까봐요.

재영 아버지 :그 애 이름이 뭐죠?

나 : (흐윽...ㅠㅠ 더이상 못 버티겠다)은우라는 친구에요.

재영 아버지 : 그 애는 재영이랑 같은 반 애인가요?

나 : 저는 방과후 선생님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재영 아버지 : 근데 왜 때렸죠?

나 :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요. 애들끼리 그냥 툭툭 칠때가 있어요.

재영 아버지 : 우리 재영이가 그런 거 좀 싫어해서요. 알겠고요. 지켜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 : ??????????????


''지켜보겠습니다' 라는 마지막 말씀은 분명 상처를 지켜보겠다는 뜻이었겠으나 그 순간 나를 향한 경고처럼 들렸다. '선빵은 은우가 날렸지만 재영이가 서 너대  더 때렸고 기세로는 재영이가 한참 위랍니다...'라는 말은 전하지 못했다. 아버님은 이미 언짢은 표정으로 운전해서 슝 가버리셨다. 이후 재영이 아버지가 따로 항의하신 일은 없었냐고 여쭤보니 다행히 무사히 넘어갔다고 했다. 보조 선생님은 재영이가 친구들과 싸우는 일이 왕왕 있는 편이라 아버지도 속상해서 그 순간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씀하신 것 같다고 덧붙이셨다.


아버지와 살벌한 대화에서 재영이에 대한 사랑을 느꼈다. 은우가 재영이가 싫어할만한 행동을 했을것이라고 확신하며 감싸줄때 이렇게 엄포를 놓아주는 아버지가 있어서 좋겠다 싶었다. 재영이의 당당함은 아버지의 이런 두터운 사랑 덕분일 것이다.


특별한 아이들과 웃지못할 사건사고를 함께 겪으며 배려는 어려운 게 아니라는 걸 알겠다. 내 고집을 세우기 전에 상대의 마음을 읽어주는 것,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손 보태는 것, 이유없이 믿어주는 것. 사람을 아끼는 방법을 이곳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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