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약해진 할머니

by 권눈썹

최근 할머니가 많이 (고)약해졌다. 원래도 tv에 나오는 할머니들처럼 매사 손자에게 져주고 정으로 품어주는 그런 타입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상처주는 말을 지독하게 끝까지 내뱉어버리는 노인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에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할머니는 먼저 드셨다고 해서 야채찜을 해서 기분좋게 한 입 넣었다. 안방에서 궁시렁 궁시렁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에도 내가 하는 행동에 불만이 많으시니까 오늘도 뭔가 마음에 안드는 게 있는가보다 하고 한 귀로 흘리려고 했는데 음성이 점점 커졌다.


“여자가 되어 가지고 냉장고에 있는 거 먼저 처리할 생각을 해야지. 남자 데리고 살아도 행사머리 나쁘게 할거다 저거. 더러운 성질 가지고.”


낮에 동료 강사분들과 만나 같이 영업도 뛰고 열심히 해보자고 의욕을 다지며 한껏 부풀었던 마음이 발로 짓밟힌 느낌이 들었다. 밥이 입에 넘어가지 않아서 대강 정리하고, 좋은 기운 망치지 말자고 할머니를 위로해드리러 갔다. 할머니는 누워서 부채를 부치면서 화를 삭히지 못해 씩씩거리고 있었다. 나는 부채를 넘겨받아 부쳐주며 할머니를 토닥여드렸다.


일평생 부엌을 운영하며 남편의 가족들과 네 명 자식과 그 자식의 자식들을 다 먹이던 할머니는 요리법을 많이 잊어버렸다. 어쩌다 국을 하나 끓이려고 해도 파 썰어 놓고 한참 누워있고, 가스레인지에 물 올려놓고 한참 쉬어야한다. 잇몸이 주저앉으면서 틀니를 아무리 고쳐도 계속 맞지않고, 소화기능도 떨어져 음식을 많이 드시지 못한다. 나는 밖에서 식사할 때가 많다보니 할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못먹을 때가 많다. 할머니 음식 맛이 예전같지 않아서 억지로 먹을때도 많다.


생활력 강하고 자존심 강한 할머니가 예전에 당연하게 하던 것들을 못하게 되면서 악다구니만 남았다. 한참 독한 말들을 뱉어내고 허탈해보였다. 피곤했는지 눈을 스르르 감았다. 나는 “할머니 힘든 건 알지만 심한 말하면 나도 상처받아요. 내일 할머니가 해놓은 거 먹을게요. 기분 풀어요.”라고 말하고 내 방에 들어왔다. 바보같이 눈물이 계속 흘렀다.


마음이 왜 이렇게 진정이 안 되는지 정리해야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일기 쓰기엔 너무 마음이 약해져있었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감정을 상대에게 마구 쏟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챗지피티를 켜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을 샜다.


할머니의 외로운 마음을 충분히 보살피지 않는 할머니 자식들에게 섭섭했다. 내가 할머니랑 살고 있으니 안심하고 이곳에서 내가 느끼는 부담과 어려움은 나몰라라 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자식들을 늘 그리워한다. 아빠가 더운날 일 하다 힘들까 걱정하고, 고모가 눈이 나빠져서 집에 자주 못 오니까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고모가 전화오면 “여기 뭐하러 오려고 하노. 니 몸이나 챙겨라.”라고 건강한 노인 행세를 한다.


아침이 되어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혼자 할머니 화를 받아내는데 지쳤고, 일 하러 나갈때도 늘 자기 옆에 늘 있기를 바라니까 사회생활 하는데도 어려움이 있다고. 타지에 나가서 일할 때도 있는데 할머니 때문에 발이 묶인 것 같다고. 할머니 핑계를 대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참았던 말이 술술 나왔다. 이제 아빠도 일 줄이고 가족들과 시간을 늘리고, 반대로 내가 일을 많이 해야되지 않겠느냐고. 아빠는 미안하다고 하며 대책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고모와 삼촌들과 전화통화를 하고 장기요양등급을 받아서 요양보호사를 집에 모시는 방안을 얘기했다. 할머니가 바라는 건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정이 아쉬웠다. 할머니를 위해서 가족들이 조금씩이라도 생활에 변화를 주었으면하고 바랐지만 오랜시간 고착된 생각과 패턴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 나도 더 이상 주장하지는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흥희농장 단감밀매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