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눈썹 Nov 08. 2023

흥희농장 단감밀매사건

윤 여사와 둘이 같이 산지 2년째. 처음 일 년 정도는 식사시간을 맞추고 TV를 같이보는 등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는 시간부터 식성, 좋아하는 TV프로그램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어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관계가 나빠졌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각자 편한대로 살게 되었고 지금은 셰어하우스 메이트처럼 지낸다. 시간 맞으면 같이 밥 해먹고 필요할 때 서로 도와주는 식이다. 윤 여사는 이 체제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내가 호응을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산다. 그래도 제일 가까이서 그녀의 역성을 들어주는 사람도 나다.


윤 여사는 새벽부터 일어나 경 외우고 동분서주 움직이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건만 올해 들어 힘이 많이 빠졌다. 움직이는 시간보다 누워지내는 시간이 많다. 그런 그녀도 가을이 되니 활력이 돈다. 병뚜껑 딸 힘도 없으면서 이웃에 감 나누는 일만은 사력을 다한다.


'윤희순'의 '희' 부군 '권흥락'의 '흥'에서 따온 이름인 '흥희농장'은 단감을 주력으로 하는 농장이다. 현재 아들이 이어받아 며느리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가을이 되면 이주에 한 번 정도 흥희농장 마크가 찍힌 박스가 서너 상자씩 도착한다. 시원하고 햇살 좋은 가을은 가수들도 바쁘다. 축제, 행사가 몰려있어 집을 많이 돌보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갔다. 올해 흥희농장에서 도착한 감은 구경도 해보기 전에 사라졌다. 어릴 때부터 너무 흔하게 먹어 특별히 먹고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데 아무리 그래도 한 두 개는 챙겨줄 수 있지 않나? 빈 박스만 보니 윤여사에게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없는 주말이 생겨 동생 부부와 함께 흥희농장 추수를 도우러 갔다. 사다리 타고 나무도 타고 작대기로 당기기도 하며 컨테이너를 가득 채웠다. 일 마치고 저녁 먹는데 윤 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한테 감 몇상자만 집에 보내줄 수 있냐고 물어봐라


직접 물어보면 되지 뭘 그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나 본인답지 않게. 이때다 싶어 권사장에게 '나는 올해 감 한번도 먹어보지도 못했다. 내가 주변 사람들 챙겨주려고 하면 얼마나 가져갈꺼냐고 신경질 낸다.' 뒷담화를 했다. 권사장은 웃으면서 '할머니가 미안한갑다. 자기는 일 못 돕는데 감 달라는 소리만 하려니까. 손녀는 만만하니까 할 말 못할 말 다하는가보네. 열 박스는 더 갔는데... 노인정에는 따로 보냈는데? 필요한 데가 있는가보다 그러려니 해라.'했다.


흥희농장은 가을마다 감을 수확하면 주변 이웃들에게 나누어준다. 알이 굵고 상처가 없고 깨끗한 것일수록 값이 비싸다. 탄저병으로 표면에 검은 얼룩이 생긴 감, 알이 잘고 모양이 완만하지 않은 감은 맛은 A급과 똑같지만 가격이 터무니없이 낮아 주변과 나눈다. 감농사를 짓는다는 걸 알고 있는 이웃들이 감을 구입하고 싶다고 이야기 할 때가 많다. 그런데 권 사장은 그때마다 돈을 받지 않고 그냥 준다. 이웃들에게 장사하다 괜히 오해가 생기는 일을 만들기 싫고, 굳이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도매시장으로 한번에 납품하는 것이 경비 등을 생각하면 편리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꼭 그 때문이 아니라도 권 사장은 자기가 모든 사업을 핸들링하는 것을 좋아하지, 감을 판매하는 일에 있어서 누군가 관여하는 것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 태풍 매미로 감 농사를 완전히 망치게 되었을때. 내가 감을 한번 팔아볼까하고 제안한 적 있는데 단칼에 거절 당하기도 했다.


감을 선물받은 이웃들은 포도나 감귤을 사오며 감사인사를 한다. 요즘 시대는 옆 집 사람 얼굴도 모르고 사는데 매 년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되니까 참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나눠먹을 사람이 있나. 왜 그렇게 집착을 하는지 이해가 안갔다.


오래지 않아 그녀의 수상한 행동의 전모가  밝혀졌다. 며칠 전 오후 네 시 경 이른저녁을 먹으러 집에 들렀다. 집 앞에는 감박스 다섯 개가 쌓여있었다. 윤여사의 부탁으로 권사장이 또 감을 보낸 모양이다. 감박스를 집 안에 들여다 놓고 나왔다. 오후 여섯시에 강의가 있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윤 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에 왔다갔드나?

-네 잠깐 들렀어요

-아빠가 감 보냈다하던데 감이 없어서 문을 열어보이 박스가 들어가 있어서 내가 문을 열어놓고 왔나 했다.

-문이 잠겨있었으니 열쇠로 열고 들어간 거 아니유? 그리고 택배기사님이 오더라도 문을 열어서 박스를 안에까지 넣어주진 않지.

-그래 그래 잘했다. 내가 그거 넣으려면 식겁을 하는데 어째하나 걱정했드마는. 오늘 몇시에 오노.

-오늘 영도에서 수업하니까 10시반이나 11시쯤 도착할거 같아요.

-그래 그래 알겠다.


원래는 10시반 11시에 도착한다고 하면 '니가 하는 일은 왜 맨날 그래 늦게 마쳐야하노' 타박하며 전화를 훽 끊는데 오늘은 감이 와서 그런지, 내가 감 박스를 넣고 가서 그런지 기분 좋게 통화를 했다. 툴툴거리며 말했지만 그녀가 좋아하니 나도 마음이 좋았다.


수업이 길어져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집에 도착해서 비몽사몽으로 씻고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바다수영을 갔다가 집에 오전 9시반 쯤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윤 여사와 만났다. 옷차림으로 미뤄보건대 아파트 근처 어디에 가는 모양이었다. 윤 여사는 나쁜 짓을 들킨 사람처럼 뜨끔하게 날 쳐다봤다.


-무슨 수영을 이래 일찍 하고 오드노?

하고는 내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내 감 15만원어치 다 팔아뿌다.


그러게 어제 도착했던 15kg짜리 감 박스 다섯 개가 온데간데 사라졌다. 하룻밤 사이에 이걸 다 없앤것도 놀라운데 팔았다는건 또 무슨소리지?


-할머니 감을 팔았다고요?

-내가 팔라고 판게 아이고 3동에 할마이가 이 감 좋은데 사람들이 사고싶어한다카는기라. 5동에는 감 만원어치 사가드만 오늘 또 이만원어치 더 사간다하고. 열시에는 빌라사람이 와서 가져가기로 했다.


얼씨구. 집으로 손님을 받기까지 했나보네. 권사장이 알면 기가 찰 노릇이었다. 큰소리가 날수도 있다. 윤 여사를 곤란하게 만들어보자 작정하고 사악한 마음을 먹으면 다 불어버릴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일단 한번 물러섰다. 박스 옮겨줘서 고맙다고 15만원에서 나에게 2만원을 떼서 줬다. 2만원 때문에 입을 닫은 건 절대 아니고 윤여사의 앞으로 행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참았다.


오전 시간을 잠으로 다 보내고 점심을 챙겨먹는데 윤 여사가 또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가 처음부터 팔려고 한 건 아니고. 3동에 할마이가 나를 좋게 보는기라. 나한테 자기 손자 국민은행 다니는데 손녀랑 결혼안시킬라우 물어본다.

-그 할머니 아직도 그러시나. 나는 생각 없다고 말해줘야지.

-그 할마이가 이 감이 너무 좋은데 퍼주기만 할거냐고 빌라에 누구누구도 필요하다고하는데 팔아보면 안되나해서. 그 사람한테 주는데 10층에 아지매도 따라와서 나도 같이 가면 안되냐하고 그러니까 그 옆에 사람도 골프 치는데 사람들이랑 반개씩 갈라 먹을라 한다고 사간다하고. 올개 감이 많이 안났단다. 그래서 마트에 가면 많이 비싸다하대. 우리꺼는 감도좋고 맛있다고 다들 좋다한다.

-아니 그래도 할머니 우리 먹을건 남겨놔야지. 그리고 나도 나눠줄 사람들 있는데 주는것도 모자라 팔아버리면 우짜노.

-또 아빠가 감 부쳐줄끼다. 냉장고에 감 쪼마이 흰 봉다리에 들어가 있다. 니 먹을거는 다 있다.


평소에 나를 힘들게 하는 복수로 윤 여사에게 일부러 딴지를 걸었는데 그녀는 내 말 때문에 기분나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하여간 꿋꿋한 여인. 감을 다 팔아버리고 룰루랄라 기쁜 윤여사를 보며 어이없어 웃음만 나왔다. 그냥 넘어가기엔 오기가 생겨서 마지막으로 시비를 걸었다.


-할머니 그러면 이제까지 열박스는 사람들한테 나눠준거에요?

-15키로 열 박스는 더 되지. 이제까지 아빠가 보내준게 처음에 다섯박스, 그다음 세박스, 또 다섯박스...

-나는 친구들이랑 언제 나눠먹어요? 한 박스는 남겨달라고 전에 부탁했는데 다 줘버리고.

-다음에 아빠가 또 준다하더라. 나는 이제 거의 다 나눠먹었다. 병원에 있어서 딸네 집에서 왔다갔다하는 그 사람 한명만 챙겨주면 된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나누고 살아서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아니면 늙은이를 누가 좋다고 찾아쌌겠노.


맏며느리로서 집안행사 선봉에 서며 언제나 주인공이었던 그녀. 왕년에 쌀장사 하며 쌀 한가마를 지고 언덕을 펄펄 뛰어다녔다는 윤 여사. 오랜만에 실력 발휘해서 두근거렸나보다. 이제 이 동네에서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건실한 아들이 농사지은 감 뿐인것이다! 아들 칭찬도 듣고, 이웃과 먹거리를 나누는 본인 인품도 칭송받고. 그녀의 인기유지를 위해 나도 단감밀매사건에 대해 눈 감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