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있었던 일을 썼다 마무리를 못 짓고 몇 주가 흘렀다. 그동안 웃지 못할 해프닝들이 많았는데, 글감으로 재미있는 것들이지만 함께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웃으며 넘기기에는 마음이 힘들었다.
이주 전 일요일에 할머니와 식사를 하고 빨래하고 청소도 해놓고 집을 나섰다. 단골 목욕탕 황토사우나방에서 누워있는데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사우나 열기가 눈물을 말려줄 새도 없이 계속 났다. 심장도 쿵쿵 뛰고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얼른 씻고 밖으로 나왔다. 곧바로 엄마에게 울면서 전화하고 그날부터 작업실에서 살기 시작했다.
작업실은 기름 보일러라 틀고 싶은만큼 마구 틀면 이주일에 한 통도 다 쓴다. (한통 채우면 20만원이다.) 그래서 보통 오방난로를 틀어놓고 견디고 너무 추울 때 한 번씩 보일러를 튼다. 겨울엔 추워서 작업실에서 오래 머물지 않는 편이었는데 갈데도 없고, 무엇보다 맘 편한 곳에 있고 싶어 그곳으로 피신했다.
그날 오랜만에 푹 잤다. 굴이랑 연어랑 아보카도처럼 할머니가 잘 안드시는 재료를 사와서 요리해 먹었다. 뜨개질 실이랑 도구도 사왔다. 밤마다 새로 나온 음악들, 옛날에 좋아했던 음악들을 들으면서 계속 뜨개질을 했다.
조용한 시간이 확보되니 자꾸만 화가 났다. 할머니 자식들이 일차적으로 가져야 할 책임을 왜 손녀인 내가 떠맡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 힘들다고 신호를 계속 보내도 아무도 듣지 않다가, 사람이 나가떨어져야 귀를 기울이는 가족들에게 원망스러웠다.
억울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그동안 왜 할머니와 살았을까 하는 생각. 가족 때문에 내 인생이 축소된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오르며 화가났다.
가출한 다음 날 오전에 요가를 마치고 나오니 할머니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여덟 통 와 있었다. 얼굴보고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어서 데이케어센터로 직접갔다. 어제 통화한 것은 잊으신 건지 사람들 많은데서 왜 전화도 안 하느냐고 화를 내셨다. 사실 그날 집에 들어갈까 생각했는데 할머니를 보는 순간 화가 올라와서 "오늘도 작업실에서 잘게요"하고 나왔다.
그 후로는 하루에 한 번 나랑 할머니가 번갈아가면서 전화를 했다. 할머니는 어떤 날은 화를 내고, 어떤 날은 "곰국 먹으러 와라"하면서 유화책을 펼치기도 했다. 당분간 서로를 위해 얼굴을 보지 않는 게 낫겠다 싶어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할머니와 살때 나는 인간 CCTV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없으면 할머니를 챙길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24시간 내내 하루종일 할머니 옆에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항상 외롭다고 했고, 혼자 밥 해먹는 것도 힘들어 하셨다.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상황인데 어쩌다보니 같이 사는 나에게 그 모든 역할과 책임이 주어졌다. 문제는 할머니가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의견이 늘 따라왔다. 일이 있거나 친구를 만나러 나가면 '환자가 집에 있는데 어디가노' 하면서 책망하고. 집에 와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보려고 하면 '왜 그런걸 해먹노' 하면서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다.
할머니를 미워하고 원망했는데, 지금은 할머니는 자기 식대로 열심히 사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로운데 본인이 원하는 만큼 내가 옆에 있지 못하니까 짜증이 나고. 몸으로는 못해도 입으로라도 집안일에 관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되는대로 할머니와 그럭저럭 살아보면서 그 내용을 글로 써서 할머니에게 복수 아닌 복수를 하려고 이 매거진을 열었던 것인데. 이제 감정을 조금 덜어내고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급하게 나오게 된 거라 필요한 물건을 찾으러 낮에 잠깐 집에 들렀다. 아직은 할머니를 보고싶지 않아서 할머니가 센터 가신 시간에 맞춰갔다. 아파트로 들어서는 언덕에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제까지 너무 힘들었는데 무시하고 살았다고 울리는 경고음이었다. 필요한 물건을 챙겨 나오면서 할머니 방을 둘러봤는데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내가 없어도 괜찮았구나 싶어 할머니와 살았던 날이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냉장고에는 냉동실에서 언제 꺼냈는지 모르는 생선이 나와 있었는데 구워놓고 오려고 하다가 괜히 할머니랑 길게 통화하게 될까봐 그냥 두고 나왔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가출로 시작해 독립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