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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눈썹 Mar 19. 2023

정원을 가꾸는 사람

20대 중반에 한동안 백수로 지내며 속앓이를 했다. 대학 졸업까지는 사회에서 정해놓은 시기에 마쳤는데, 어떤 직장에 취직해야할지 몰랐다. 취업스터디 친구들은 자기소개서의 10년 뒤 포부에 대해 '한 파트의 장이 되어 글로벌 리더가 되고 싶다'는 등 패기있게 발표했다. 직장을 다니려면 저런 비전을 가져야 할까?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나의 길은 아닌 것 같았다. 취업스터디 친구들이 하나 둘씩 취업해서 떠나는데 나는 마지막까지 남아있었고, 우울한 기분만 커졌다. 어떤 분야에서 일을 시작할지 마음을 정해야지만 그 다음이 있을 것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인문학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나는 삶의 어떤 측면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가'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는 수업이었다. 진행자분이 내가 꿈꾸는 삶의 모습을 해설해준다며 심리테스트를 해준 적이 있다.


선생님  "자신이 어떤 왕국의 왕이라면 어떤 하루를 보낼 건가요?"

나  "정원을 가꾸어 아름다운 식물을 심고 싶고, 집에 좋은 음악을 틀어놓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선생님  "혜린씨는 직장을 다니기보다는 아직 자기 내면을 가꾸는 게 좋은가봐요."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얼른 취업해서 사회에 나가야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너무 배려가 없는거 아니냐고 속으로 씩씩거렸다. 아무리 직관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타인의 마음을 정확하게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 돌아와 당시 답변을 보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욕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겠다. 음악을 하고, 공간을 운영하고, 기획을 하는 것도 나에겐 정원을 가꾸는 일이다. 




"사람들이 제 생각을 이해 못할거라 생각했어요"


이진이 자주 하는 말이다. 그녀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기타치고 음악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비건이 된지도 몇 년이 되었다. 그녀의 삶을 구성하는 많은 활동들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특이하다' '유난스럽다'는 표현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다 최근부터 글쓰기 모임에서 글을 교환하고, 지역살이 모임에 나가고, 비건모임에 참석하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꼭 가까운 사람들과 모든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밖을 조금만 돌아보면 자기와 관심사가 맞는 사람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가 있다고.


이진도 자기의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다. 메마뮤 친구친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저도 눈썹샘처럼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을 하고 싶어졌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고보면 이진은 이미 브런치로 글을 꾸준히 쓰고 있고, 유튜브도 3년을 꾸준히 운영해 왔다. 컨텐츠 만드는데 단련이 된 사람이라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도 잘하겠구나 싶었다.


메마뮤 친구친구에서 이진은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워주는 역할을 했다. 그녀는 겉보기에 여리고 순진한 면이 있는데 응원의 말을 할때 어쩐지 근엄한 말투가 되는 게 재미있어서 '교장 선생님'이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 교장 선생님은 메마뮤에서 6주동안 무려 3곡을 만들어냈다. 중간에 코로나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몇 곡 더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창작열에 탄복하며 나도 힘내서 한 곡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이진은 독립출판을 하게 되었다. <뜻밖의 글쓰기 여정>이라는 제목으로, 글쓰기를 사랑하는 마음,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책이다. 이진이 먼저 마음을 먹었는지, 내가 의견을 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북토크도 하게 되었고. 소규모로 진행해도 된다면 퍼플문에서 해보자고 제안했다. 




북토크 준비기간에 이내언니와 프랭코가 함께 연 책방, 피스카인드홈(줄여서 피카홈) 공간의 오픈행사가 있었다. 이진은 책, 비건, 음악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이내에 대해 궁금해 했다. 또 독서지도사로 두번째 커리어를 개발하고 있는 윤작가도 가고 싶다고 해서 세 명이 피카홈에 놀러갔다.


이내언니는 내가 음악활동을 하는데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음악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편견을 없애준 사람이고. 클럽공연을 중심으로 인디음악을 알려야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해준 사람이다. 언니는 자기 음악이 필요하고, 결이 맞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여행하듯 살아가는 언니를 보며 나도 저렇게 음악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언니가 했던 활동을 그대로 따라간다.


피카홈 멤버십을 구독하면 이내와 프랭코가 큐레이션한 책 소개 꾸러미를 받을 수 있고, 책과 관련한 모임에 참여할 수 있어요!


이내의 트레이드 마크는 그녀가 만드는 시간이다. 그녀의 공연은 언제나 평화롭고, 경쾌하고, 부담이 없다. 그래서 나는 언니의 공연을 즐겨 찾으며, 나만의 트레이드 마크는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한다. 


관객들의 대화와 이내의 노래, 공간에 대한 소개가 왔다갔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오픈행사. 나도 언니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한 곡을 불렀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너무 자연스럽게 순서가 와서 당황스러웠지만 그게 또 이내의 매력이지. 벌벌 떨면서 노래를 불렀지만 평소처럼 오래 심란하진 않았다. 이내의 행사이니까 자연스럽고 오히려 좋아!

이내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inesbriz/


피스카인드 홈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eace.kind.home/


좋아하는 친구들을 양쪽에 데리고 언니 공연을 가서 팬으로서 체면도 서고 흐뭇했다. 공연이 끝나고 다른 약속이 있어서 나는 먼저 나오고 초면이었던 두 사람은 근처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놀다가 커피까지 마시고 이야기에 심취해서 버스를 반대로 탔는데, 종점에 내려서야 잘못탄 걸 알고 좀비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고 했다. 글쓰기를 사랑하는 친구들이라 하고 싶은 말이 계속 이어졌나보다. 윤작가는 낯을 많이 가려서 보통 초면에 단 둘이 오랜시간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는데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즐겁게 회상했다.




이진 북토크는 흡사 그녀의 팬미팅 현장이었다. 멀리 서울에서 그녀를 보러 온 팬 분도 있었다. 이진은 노래도 하고, 강의도 하고, 사람들과 대화시간도 마련했다. 정말 하고싶은 거 다하네!


이진은 한 명 한 명 감사편지를 쓰고 간식 꾸러미를 만들었다. 오후 내내 포장하느라 애썼다고 했다. 기타랑 노트북부터 책까지 바리바리 챙겨왔는데 혼자 참 힘들었겠다 싶었다. 

그날 관객들은 이제까지 퍼플문에 방문했던 사람들과는 스타일이 조금 달랐다. 퍼플문에서 공연이나 프로그램을 하면 흥을 이기지 못해서 마치고 몇 시간씩 노래를 부르며 놀거나, 좀 더  놀고 싶어서 발걸음을 느리게 옮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 온 사람들은 얌전히 도착하여 질문에 대해 자기 생각을 오래도록 세세하게 얘기하고 공연이 끝나자 10분 내로 자리를 떴다.




북토크를 마치고 짐을 옮기려고 이진의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탔다. 최근에 이사해서 지리가 헷갈렸나보다. 기사님이 '여기서 우측으로 갈까요?' 했는데 이진이 '쭉 가주시면 되요' 하면서 잠깐 헤맸다. 집에 내려서 식당을 찾을때도 집에서 3정거장 정도 거리에 있는 곳으로 가자고 먼저 제안해놓고 생각보다 멀어서 '어 거기가 그렇게 멀었나?'하고 갸우뚱했다. 북토크에서는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서 다 잘하더니만 일상생활에선 허술함이 많은 그녀.


이진이 일에 대해 고민을 토로하며 자신은 일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개인적인 애정을 가지고 관심으로 바라보는데 상대는 그걸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했다. 스스로는 내가 뭘 잘하는지 잘 아는데,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 스트레스가 많다고. 나의 시선이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돈이 되지 않는 것에 마음이 끌리는데 그래서 더 애틋하다고 느껴진다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젠 누구 입에서 먼저 나왔는지 모를 말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이진의 북토크를 축하하며 '우리의 에너지를 아무에게나 뻇기지 맙시다' 고 얘기했다. 우리는 작은 것도 깊이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앞으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영감을 모아서 아름답게 펼칠 수 있는 자리에 활짝 펼치자고 결의했다.


나의 시선을 계속해서 표현하는 것이 어떨  때는 자아도취처럼 느껴져서 오글거릴 때가 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말하기 민망하거나 용기가 나지 않는 이야기도 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글을 공유하고, 음악을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특별한 능력인 것 같다. 마음을 정화하는 아름다운 음악성. 날카로운 필력이라는 것도 존재하지만, 꾸준히 나의 정원을 가꾸는 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진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leejinand/


이진 유튜브 Jin with the guitar

https://www.youtube.com/@Jinwiththegui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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