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은 사랑이 아닌 것을
연석은 어릴 적 자신의 이름이 아현동집 도련님인 줄 알았다. 연석의 아버지는 타인을 제압할 만큼의 잘생긴 외모였다. 굵고 분명한 선의 갈매기 눈썹아래 눈매는 매섭지만 반듯했다. 활주로만큼 걸림 없이 뻗은 콧대는 두터운 콧방울로 모아졌고 입술엔 지성이 묻어났다. 국내 유일무이한 방산업체의 3대째 장손으로 젊은 나이에 대표직을 맡고 있었다. 외모만큼이나 탁월한 경영능력에 회사의 부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그 성과의 공신들 중 주류엔 연석의 어머니도 있었다.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인연이었으나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과 부부 그 이상의 파트너로서 든든한 신뢰가 있었다. 두 분은 함께 해내야 하는 것이 많았기에 아현동 집 도련님은 자주 혼자가 되었다.
사실상 어린 연석이 홀로 남겨진 적은 없었다. 어머니를 대신하던 유모뿐 아니라 아현동 집에 거주하며 집안일을 도맡던 식모들이 곁에 있었다. 그들은 그를 아현동집 도련님이라 불렀다. 도련님이라고 그들 모두에게 좋은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다. 보호자의 부재 시간이 당연해질수록 어린 그를 우습게 보는 주제넘은 방자한 식모도 있었다. 갓 스무 살이 된 젊은 식모의 눈에 비친 어린 도련님은 아니꼽고 새끼 강아지마냥 다루기 쉬웠다. 젊은 식모는 종종 모두의 눈을 피해 어린 도련님에게 못되게 굴었다.
“몇 살인데 아직도 흘려. 바닥이 이게 뭐야. 날 골리려 일부로 그러는 거지? 다 주워 먹고 무릎 끓고 손들고 있어. 어휴 지겨워”
연석은 타고난 성품 자체가 순하고 마음이 여렸기에 젊은 식모의 어이없는 행동이 바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기민한 그의 어머니는 젊은 식모의 만행을 오래지 않아 알아차렸고 젊은 식모의 일손을 대신할 다른 이를 구했다.
젊은 식모가 더 이상에 집에 없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했는데 아현동 집 도련님은 새로운 일손이 데려온 아이에게 관심이 쏠렸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자신만큼 말 수가 적어 바로 다가가기 망설여졌지만 얌전한 행동에 비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한 날엔 새로 온 일손이 연석이 읽고 버린 책을 주어다 아들에게 읽히는 것을 보았다. 그날 이후 아현동 집 도련님은 그 아이를 위해 더 많이 더 빨리 책들을 읽어냈다. 연석은 타고나길 그렇게 정이 깊은 아이다.
혈관 속에 새겨진 기질과 성품은 흐르는 피를 갈아엎지 않는 한 변하는 법이 없다. 더욱이 얕은 파도 한 번 몰아친 적 없는 그와 같은 인생에선 반문할 여지없이 그 성질이 굳어지는 법이다.
연석이 가연을 처음 마주한 것은 부모님이 마련한 자리가 아니었다. 대학 부근의 허름하고 구불한 술집 골목 그곳에 가연이 있었다. 비가 후드러지게 내리는 날이었다. 연석이 앉아 있는 술집 맞은편 주점의 처마 밑에 그녀가 서있었다. 떨어지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의 태는 그곳과 너무나 상극이어 시선을 끌었다. 묵직한 긴 생머리에 비가 오는 흐린 날인데도 빛을 내는 하얀 얼굴 오뚝한 버선코는 초점 없는 그녀의 눈을 숨겨주었고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몸선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가연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연석은 무슨 마음이 솟아났는지 검은 우산을 들고 폭이 좁은 그 거리를 가로질러 가연에게 다가갔다. 구해주고 싶었다. 우산을 펴 그녀의 머리 위로 덮어주었다. 알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헤매던 가연의 눈빛이 그에게로 모아졌고 그런 그녀가 연석은 시렸다. 마음이 애잔해지면서 몹시 시려왔다.
정략결혼에 대한 거부감은 처음부터 없었다. 연석은 부모님을 보며 사랑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신의로 쌓아가는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 자리에서 가연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는데 인연이 겹치니 운명 같았다. 예정된 인연이었으니 결혼으로 이어진 수순은 자연스러웠다. 연석은 아버지처럼 늘 충실했고 책임을 다했다. 다만 그러한 노력에도 좀처럼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한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와는 부모님처럼 그 이상의 애정과 신뢰가 축척되지 않는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섞이지 않는 관계는 늘 제자리 같았다.
가연이 허물을 벗고 자신만의 방을 만들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연석은 그녀에게 물었다.
“왜 결혼했어 나와?”
“지쳤었어. 쉬고 싶었고 기댈 곳이 없었어. 당신은 나무 같았고 나는 그게 좋았어.”
“그럼 지금은 행복해?”
가연은 잠시 멈추었다가 그에게 입을 열었다.
“더 쉬고 싶어. 나는 당신이 필요해”
실망스럽거나 마음이 슬퍼지는 대답은 아니다. 처음 만난 순간에도 연석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고 구해주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가연을 보며 늘 시리던 마음이면 충분했다. 정이 깊고 여린 연석은 어른이 되어도 변함없었기에 치유되지 못한 가연을 보살피는 의무감으로 살아내라 하면 그의 수기를 다 빼앗기는 날까지 그리 살아낼 그였다. 이연을 알게 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랑은 시간을 두고 쌓아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면하는 순간 가득 차 버리는 사랑이 있었다. 연석에게는 이연이 그러했다.
연석은 후회하는 날들이 쌓여갔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어. 연민은 사랑이 아닌 것을.’
연석은 한들거리며 웃어주던 코스모스를 기어코 꺽지 못한 자신에 자괴감이 몰아치며 고통스러웠다.
시린 가연을 저버리지도 못할 테고 사랑하는 이연을 놓지도 못할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