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3년이 지났다
태우는 동료 연구진 3명과 함께 뉴욕에서 열리는 지질, 환경포럼에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동료들과 인천 공항에서 현지로 출국했다
바쁜 3일 일정을 무사히 소화하고 마지막 날은 개인별 휴식이 주어졌다
오랜 지인의 배려로 필립모리스 본사 마케팅 부서 팀장을 소개받아 도심 속 식당에서 저녁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만남의 목적은 사라진 헬렌의 근황이 궁금해서 그녀의 측근 부서 한 사람을 어렵사리 소개받게 되었다
통화상으로 헬렌의 궁금증과 소식을 물었으나 굳이
만나서 얘기를 나누자는 그 사람의 의중이 몹씨 궁금했다
이른 저녁 약속 장소에서 '스티브'란 이름의 백인 남자 한 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간단한 식사와 맥주를 시켰다
식사가 나오기 전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했다
"헬렌 본부장님을 찾아오셨죠?"
"그분은 아쉽게도 이 세상에 안 계십니다"
"네 ???.."
"3년 전 휴가차 터키 여행을 다녀오셨는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911 응급 앰블 랜스에 실려 병원으로 급히 이송했으나
혼수상태에서 이틀 만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뜨셨습니다"
"본부장님은 여행 전에도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온다며 병원 정밀 검사를 받으셨는데
결과가 나오기 전에 이미 터키 여행을 떠나버려서 검진 결과를 보시지 못했던 거죠"
"그때 왜 그렇게 서둘러 여행길을 떠나셨는지 모르겠어요"
"여행을 마치고 터키에서 돌아온 후에 아마 결과를 보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여행 중에 검진 결과가 나왔는데 안타깝게도 그땐 이미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전신에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였습니다 혈액암 말기 셨습니다"
"주치 의사 말에 의하면 그 상태에서 어떻게 여행을 무사히 마치셨는지 불가사의하다며 매우 놀라워 했답니다"
"왜 결과를 여행지에 알리지 않았을까요"
"이미 결과를 뒤 바꿀수 없는 상태 였기에 마지막 여행을 즐기라는 책임 의료진의 배려였을 겁니다"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그동안 벌어지고 있었구나ᆢ
"아, 헬렌ᆢ그것도 모르고 나 혼자 괜한 추측과 상상으로 오해하고 원망스러워했구나.. 오, 하나님.."
"주여, 이 못난 인간을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ᆢ"
스티브 팀장에게는 우리의 즐거웠던 그 터키 여행에 대하여 거짓 없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줬다
"여행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셔서 암마저도
두 분의 여정을 방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스티브는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며 신기한 듯 말했다
여행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잠복 중이던 병마가 급습한 것이라고 혼자서 나름 짐작했다
계속 함께 계셨더라면 아직도 살아계실지도 모르겠다는 황당한 추측을 스티브는 덧 붙이기도 했다
스티브 말대로 아직도 우리가 함께 했다면 정말 그녀는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ᆢ
스티브의 안내로 한적한 도시 외곽 공원묘지에서 잠들어 있는 헬렌을 만났다
묘지에 그녀는 편히 잠들어 있는 듯싶었다
꽃다발을 묘비 앞에 정중히 내려놓았다
묵념을 하며 속 마음을 전했다
"헬렌ᆢ당신과의 여행은 최고였습니다"
"당신도 물론 최고였지요"
"행복했던 여행이었습니다"
"오대산 선제길 단풍도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나 혼자 가게 됐네요"
속으로 몇번이고 진심으로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헬렌이 준 마지막 선물 '버지니아 슬림' 담배를 꺼내 스티브와 나눠 피웠다
스티브가 말했다
"본부장님이 맡은 부서가 마케팅 부서여서 새로 출시되는 담배에 관심이 많았고
본부장님이 제일 먼저 담배 맛을 테스트하고 평가하셨죠"
"그 계통에서는 세계에서 독보적인 분이셨으니까요"
"회장님께서도 그분의 죽음을 너무 애석해 하셨고 슬퍼하셨습니다"
"유일하게 오너께서 소중하게 대하셨던 분 중에 한분이셨습니다"
오랫동안 담배 흡연이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바람처럼 흩어지는 모양이다
태우는 학계 출장과 헬렌의 비보를 가슴에 안고 허망하게 바람처럼 쓸쓸하게 귀국했다
차라리 생사를 모른 채 살아갔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후회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여름 '태우'는 장마 속 미얀마 밀림 탐사 중 행방불명됐다
세명의 탐사대 중에 두 명의 대원도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
미얀마 원주민의 설에 의하면
인적이 닿지 않는 오지마을 원시 부족 촌에서
태우와 인상착의가 닮은 사람을 봤다는 이야기도 돌았지만
확인되지 않은 풍설로 여겨졌고
밀림 탐사 중 조난으로 아사했으리라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현지 합동 조사반이 한 달 동안 밀림을 샅샅이 탐색했지만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결국 실종 처리되었으나 사망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는 태국 남쪽 섬 '코 리페'에서 어부들 틈에서 태우 닮은 한국인을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도 확인 할 수 없는 낭설이라고 흘려버렸다
그렇게 태우마저 사라져 버리고
그 실종 사건은 아직 풀지 못한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다
사랑이 가증스러워
작별한다
변절한 모든 것들과 이별한다
사람의 속이 결코 수려하지 못해서
갈라 선다
세월과도 이별한다
시간과도 작별한다
꽃과의 이별
애증과의 이별
용서와도 이별이다
이별과도 이별이다
나와도 물론 이별이다
이별을 해보니 알겠다
다시 흰 도화지로 돌아간다는 것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을
생이 저 산 모퉁이를 돌아가는 짐 진 나귀와 닮았다는 것을
사랑은 한순간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별의 시간은 조용해야 한다
작별은 또 다른 시작이니
감내해야 한다
이별의 맛은 벌거벗은 임금님 닮은 자유
코피 쏟아지는 봄날
섬진 강가에 매화 터지고
춘풍은 애간장 녹이는데
우리는 다만
숨 죽이고 이별을 준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