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억 속 으 로

by 시인 화가 김낙필



H가 그 계절 속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깊은 겨울이었다
양가죽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불판에 멧돼지 고기를 구우며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주인장이 담은 파김치가 시어 꼬부라졌지만 뒷 맛은 칼칼하고 개운했다
젓갈에 농익어 김치의 맛이 한결 깊었다

어느새 가을걷이가 끝나버린 고추밭이며 배추밭에는 무서리가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애기봉 전망대 쪽으로 난 길을 달리며 취기가 올라왔다
음주 운전의 못된 버릇은 세월이 가도 고쳐지지 않는다
호된 임자를 못 만난 까닭이다

小雪이 지나자 전망대에 꼬마전등을 단 츄리가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추운 밖의 날씨 때문에 앞유리에 서리가 끼기 시작한다
와이퍼를 자주 작동하며 차를 몰아야 했다

우린 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이미 감지했다
배신의 골이 깊고 쓰려서 삶의 의욕조차 잃어가고 있을 때,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자존감을 증명하고 싶어서 오히려 더 발버둥 쳤는지도 모른다
계절을 수십 차례 보내면서 상처는 길들여졌고 서로에게 물안개처럼 스며 들어갔다

가장 아플 때 고통을 같이 해준 주홍글씨의 또 다른 이름은
복수의 이름이고
열락의 자리였지만
가장 고맙고 소중한
은혜였다고 추억한다

힘들고 아팠을 때 위로가 돼준 불륜이라는 붉은 자동차는
장미꽃 향기처럼 아늑했다
바닥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핀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오늘, 상처는 아물고 스스로
혼자 노는 법을 배워가며 산다
달항아리 계곡의 깊은 겨울처럼 고마운 날들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줘서 고맙고 또 감사하다

그 계절 우리는 이은미의 '기억 속으로'를 즐겨 듣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