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비서ᆢ 미라노 내 계좌에서 저분이 원하시는 금액을 꺼내서 드리도록 하세요"
"하룻밤 같이 잔 비용입니다"
"아셨죠?"
나는 팀 미팅 시간이 다가와 급히 제2 회의실로 향했다
다음 달 있을 컬렉션 디자인 쇼에 관한 디테일을 점검하는 팀 회의였다
담당자별 만반의 준비를 확인한 후 회의는 순조롭게 끝이 났다
회장실로 올라가 그간의 업계 동향과 진행사항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회장은 더 이상 토를 달거나 상세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유 이사, 아까 그대를 방문한 꽃뱀 일은 잘 처리했는가"
"네, 원하는 대로 대가를 내 계좌에서 지불하라고 강 비서에게 부탁해놓고 올라왔는데
해결이 됐겠죠 뭐"
"전략팀에 내려가는 길에 확인해 보죠"
"아니 그러지 말고 지금 물어보지 뭐"
윤 회장은 그 자리에서 폰으로 강 비서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다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강 비서가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어, 강 비서 유 이사 꽃 사건 비용 지불했나?"
"얼마나 요구하던가?"
"네, 요구액을 물었더니
큰 거 한 장을 요구해서 좀 심하다 싶어서 말을 끊었더니
그쪽도 말을 끊더라고요"
"큰 거면 만불을 말하는 거냐고 했더니
웃으면서 십만 불을 말하더라고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건 곤란하다고 했더니"
"푼돈은 싫다며
웃으면서 그냥 가버리더라고요"
"뭐? 그냥 가버렸다고?"
"유 이사, 돈 굳었네 허허"
가만히 상황을 듣고 보니 보통 여자가 아님을 즉각 판단했다
원나잇 비용을 청구하러 회사까지 찾아와 회장실에서 나를 만나려 했던 것을 미루어볼 때
여간 황당스러운 인격체가 아닌가 싶었다
회장이야 워낙 그 방면의 고수로 업계에서도 소문난 바람둥이이니 이번 내 상황이야
별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돈이면 해결되는 단순한 일로 치부했다
그런데 상황이 달랐다
요구한 황당한 금액이며
그냥 가버렸다는 상황이 황당하기만 했다
유 이사는 이번 일이 이대로 종결된 것인지 앞으로 무슨 일이 또 벌어질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복잡 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윤 회장이 일갈했다
"유 이사, 돈 굳었으니 오늘은 그대가 거하게 한잔 시시게
안 그러신가?"
"아, 예 그러시죠"
"오케이, 그럼 업무 마감하시고 십 분 후에 현관 로비로 나오시게"
"예, 그러시죠 그리 나가겠습니다"
"강 비서, 차 좀 대기시켜요"
"네, 회장님 정문 현관에 대기시키겠습니다"
"그래요, 나가봐요"
"강 비서도 별일 없으니 퇴근하세요"
윤 회장과 나는
중, 고, 대학 동기 동창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다
K사에서 근무하는 나를 이 회사로 빼돌린 장본인이다
이직을 원하지 않았으나 먼저 회사 회장을 간곡히 설득해서
나를 이 회사로 데려왔다
이 사건으로 K사 회장에게는 괜히 미안하고
껄끄러운 사이가 돼버렸다
가끔 업무관계로 만날 일이 있으면 영 불편하고 송구스럽다
윤 회장은 날 데려다 놓고 회사일은 뒷전이고 자기 사생활을 맘 껏 즐기는 중이다
모든 일은 나한테 일임하고 부담 없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 윤 회장이 60년간 이룬 탄탄한 회사를 아들 윤 회장이 맡은 지 불과 10년도 채 안됐다
아들 윤 회장도 워낙 재계에서 발이 넓고 인맥이 탄탄해서
재계 10위권의 회사를 무리 없이 운영해 나가고 있다
그 대신 유 이사가 업무에 치여 죽을 맛이다
업무차 뉴욕지사를 방문하고 귀국 비행기에서 밀린 잠에 빠져든 사이 꿈결처럼 기체가
여러 번 흔들렸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지만 몰랐다
갑작스러운 폭풍우를 만나 운행이 순조롭지 못했고 예정 도착시간보다
한 시간여 연착한 모양이었다
간단한 짐을 찾고 터미널을 빠져나오는데 리무진이 거의 끊겨가는 시간이다
분당 쪽 방향은 다행히 막차 하나가 남았는지 두어 사람 기다리는 손님이 있었다
늦은 시간 도착이라 회사나 직원들에게 출국장에 나오는 걸 불허했다
바로 택시나 리무진으로 집으로 가면 될 터이니 번거롭게 하기 싫었다
앞에 한 여인이 기다리다 무엇에 쫓기는 듯 자꾸 뒤를 돌아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을 건넨다
"저 선생님, 제가 볼일이 급해서 짐을 잠깐 봐주시면 금방 다녀올게요"
"분당까지 가는 동안 못 참을 듯싶어서요"
"부탁해도 될까요?"
"아, 그러세요 빨리 다녀오세요"
"가방은 제가 봐 드릴게요"
4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이 여인은
내게 캐리어를 부탁하고 입국장 안으로 종종걸음 치며 사라졌다
10분 후 분당 가는 리무진은 도착했는데 여인은 나타나질 않는다
버스 기사가 막차니 얼른 타라고 재촉한다
동행이 화장실을 갔다고 사정했지만 결국 버스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출발하고 말았다
남의 짐을 맡았으니 놔두고 나만 갈 수도 없는 처지라
그냥 그 여인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막차는 떠나가고 터미널엔 나만 휑덩그레 남겨져 버렸다
잠시 후 여인이 헐레벌떡 나타나셨다
"선생님, 차는 요?"
"떠나 버렸습니다"
"네, 어쩌나 저 때문에 선생님까지 계속 못 가셨으니 이 일을 어쩌죠"
"제가 택시로 모실게요"
"아, 괜찮습니다 여기서 각자 갈길로 가시는 거로 하시죠"
"그쪽은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저는 부산까지 가는데 버스는 이미 세 시간 전에 끊겨서 서울서 일박을 하고 가려는데
분당차가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다 선생님을 만났고요"
"아, 종착지가 멀군요"
"그럼 서울 쪽으로 함께 나가시죠"
그렇게 처음 만난 남녀가 콜택시를 타고 강남터미널 J 호텔 로비까지 동행하게 되었고
그날 밤 동숙을 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간단한 메모를 남겨놓고 호텔을 빠져나와 분당 집으로 가서
대충 정리하고 느지막이 삼성동 본사로 출근했다
그 후 그녀와는 연락 없이 한 달 여가 지나갔다
아침에 깨어나서 메모보고 느지막이 터미널에서 우등고속 타고 부산으로 잘 갔겠지
"우연한 인연으로 하루의 연을 맺었습니다 혹여 연락할 일이 생기시면
이 연락처로 연락 주십시오ᆢ"
한 달이 지난 후 불쑥 사전 연락도 없이 그 여자는 본사 회장실로 나를 찾아왔다
이름은 정 인숙
뉴욕대 유학 중인 딸 하나
부산거주
의류업에 종사
남미 쪽을 근거지로 사업 활동 중
재력은 모르겠음
회장실에 친구라고 둘러 댄 뒤
나에 관한 사항을 알고 싶다며 면담 신청을 했다고 함
회장은 친구 일이라니 장난 삼아 호기심이 일어 면담을 받아 드린 듯함
회장실을 들어서자 그녀는 소파에 앉은 채로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해바라기 같았다
노란 정장 원피스에 장밋빛 숄을 걸치고 요염한 얼굴이 매혹적이어서
그날 만났던 여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불싸, 뭔가 잘못 돼가고 있구나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회장에겐 나와의 그간 일박을 솔직하게 얘기를 다한 상황이었다
회장은 고수다
이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입장도 아니고 손님을 정중히 환대했다
유 이사 3층 상담 2실 강 비서에게 열어 놓으라고 했으니 자릴 옮겨 차라도 마시며
못다 한 얘길 나누도록 하세요 하며 우리 둘을 밀어냈다
"선생님 그날 어땠어요"
"저는 좋았는데 하하"
"집에 들어가서 별일 없으셨죠"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혼자 내빼는 법이 어딨어요"
"오늘 식사 같이 했으면 해서요"
"일 때문에 서울 왔다가 보고 가려고 들렀는데 괜찮죠?"
"사전 연락도 없이 회사에 무작정 쳐들어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니죠"
"그것도 회장실까지 방문한 이유는 뭡니까"
"제 입장을 전혀 고려치 않는 무례한 행동 아닌가요?"
"이러는 목적이 뭡니까"
"대가를 원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요구하는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비서실에 연락해 놓을 테니 강 비서에게 얘기하고 요구액을
받아 가십시오"
"저는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엔 이러 일이 없도록 주의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폰으로 강 비서를 연결시켜주고 상담실을 나와 미팅 장소로 향했다
그렇게 정인숙과의 두 번째 만남이 지나갔다
내게는 삼 년째 사귀는 애인이 있다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다
시를 읊고, 쓰는 시인이시다
늘 감성이 충만하고 성실하고 착한 여인이다
학생들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선생님이시다
내가 늘 업무에 바빠도 투정 한번 없고 내 건강을 늘 걱정하고 염려해주는
천사 같은 여자다
정인숙과는 정반대의 감성을 가진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