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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Apr 12. 2020

칼날을 쥔 채 써내려간 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여성을 보통 약자라 하나 결국 강자이며, 여성을 작다 하나 위대한 것은 여성이외다. 행복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있는 것이외다. 가정을 지배하고 남편을 지배하고 자식을 지배한 나머지에 사회까지 지배하소서. 최후 승리는 여성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1960년에 태어난 엄마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스물 여섯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르간을 배웠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야마하 악기상에서 직원으로 근무하다, 아빠와 결혼을 해 1986년 언니를 낳았다. 그 뒤로는 네 분 어르신의 딸이자 며느리로,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왔다.  


 결혼을 하기 전 엄마의 서사에 대해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와 같은 나이에 외국에서 공부를 했고, 수입회사에 취직해 직원으로 일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시절 엄마의 가슴 속엔 얼마나 많은 꿈이 있었을까. 뒤이어 태어난 나를 키우면서 몇 번이나 그 꿈들에 대해 생각했을까 떠올리며 숨이 막힌 적이 있었다. 


 조선시대 여류 작가 나혜석. 그녀의 서사를 알게된 나는 다른 의미에서 놀라게 되었다. 100년 전 나와 비슷한 나이에 스스로 학비를 벌어 일본에서의 학업을 이어갔던 여성. 화가이자 독립운동가이자 4명의 사람을 낳아 길러낸 어머니. 자신의 결혼과 이혼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전국민에게 알렸던 한 사람. 그 시절 서울 시장이 된다면 서울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고민하고, 염문설의 상대방에게 물질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인물.


 죽을 때까지 글을 썼다고 하지만 2020년 나에게까지 전해진 이야기는 열 일곱편 뿐이다. 이혼으로 스캔들의 정점에 선 뒤 그녀의 글을 찾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어느 신문도, 잡지도, 전시회에서도 그녀의 글이나 그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혼자 힘으로 여자미술학사를 세웠지만 경영난에 문을 닫았고, 그 다음의 이야기는 1948년 12월 10일 서울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했다는 기록 뿐이다. 지금의 나처럼 자신이 원하는 시간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면 그녀의 결말은 달랐을 것이다. 


 나혜석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가 더 앞선 것을 보고 배우고자 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세상의 미묘한 이치를 느끼고자 했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공명하고자 했다. 사랑보다 사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안타깝게 여겼지만 그 모자람 그대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소설로 그림으로, 신문의 투고 글로, 기자 문인들과의 대화록으로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무엇을 위해 했느냐고 하면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살아 숨쉬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인격체라는 사실을 만끽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인간 나혜석은 똑같은 인간의 형상을 하였으나 인간에 미치지 못한 이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자신이 말한대로 칼날을 쥔 채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상대를 향해 던진 말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한껏 날이 서있다. 상처를 피하지 않고 칼날을 쥔 채 마지막까지 글을 써내려갔다. 남편의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았단 사실로 인해 협의이혼을 했으나, 재산분할도 친권도 인정받지 못했다. 4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적어도 그녀가 일정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리고 여성이 가정과 나아가 사회를 지배하는 게 가능한 사회였다면, 이혼 뒤 그녀의 삶에도 또다른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남자는 칼자루를 쥔 셈이요, 여자는 칼날을 쥔 셈이니 남자 하는 데 따라 여자에게만 상처를 줄 뿐이지, 고약한 제도야, 지금은 계급 전쟁 시대지만 미구에 남녀 전쟁이 날 것이야. 그리고 다시 여조남비시대가 오면 그 사회제도는 여성 중심이 될 것이야. 무엇이든지 고정해 있지 않고 순환하니까."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에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나. 


1933년 2월 28일자 <조선일보> [모델-여인일기]






  










신여성으로 살다가 객사한 여자


- 당신 댁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네가 시집가서 첩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여편네 주도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하고 싶었다. 


p31. <경희>


- 경희는 불을 떼고 시월이는 풀을 젓는다. 위에서는 푸푸, 부글부글하는 소리, 아래에서는 밀짚의 탁탁 튀는 소리, 마치 경희가 도쿄음악학교 연주회석에서 듣던 관현악 연주 소리 같기도 하다. 또 아궁이 저 속에서 밀짚 끝에 불이 댕기며 점점 불빛이 강하게 번지는 동시에 차차 아궁이까지 가까워지자, 또 점점 불꽃이 약해져 가는 것은 마치 피아노 저 끝에서 이 끝까지 칠 때에 붕붕 하던 것이 점점 땡땡하도록 되는 음률과 같아 보인다. 열심히 젓고 앉은 시월이는 이러한 재미스러운 것을 모르겠구나 하고 제 생각을 하다가 저는 조금이라도 이 묘한 미감을 느낄 줄 아는 것이 얼마큰 행복하다고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저보다 몇십백 배 묘한 미감을 느끼는 자가 있으려니 생각할 때에 제 눈을 빼어 버리고도 싶고 제 머리를 뚜드려 바치고도 싶다. 뻘건 불꽃이 별안간 파란 빛으로 변한다. 아, 이것도 사람인가, 밥이 아깝다 하였다. 경희는 부지중 "재미도 스럽다" 하였다. 


p.44~45 <경희>


나폴레옹 시대에 파리의 전 인심을 움직이게 하던 스타엘 부인과 같은 미묘한 이해력, 요설한 웅변, 그런 기재한 사회적 인물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살아서 오를레앙을 구하고 사함에 프랑스를 구해 낸 잔 다르크 같은 백절불굴의 용진한 희생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달필의 논문가, 명쾌한 경제서의 저자로 이름을 날린 영국 여권론의 용장 포드 부인과 같은 어론에 정경하고 의지가 강고한 자가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아아 이렇게 쉽지 못하다. 이만한 실력, 이러한 희생이 들어야만 되는 것이다.



처: 굴레를 벗지 못하는 조선 남자들에게 진보가 있으면 몇 푼어치가 있겠소? 그중에도 되지 못한 것일수록 제 앞 하나 꾸리지 못하는 것이 언필청(말을 할 때마다 이르기를) 여자가 어떠니 어떠니 하는 것을 보면 참 아니꼬와. 3년 전에 먹은 오례송편이 다 나올 듯하지. 실상 학식 있고 인격 있는 남자들이야 다 자기 앞을 꾸려 가려기에 어느 여가에 여자 타령할 여유가 있답디까?

-125,6


너무나 억울하였다. 자연이 광풍을 보내사 겨우 방긋한 꽃봉오리를 참혹히 꺾어 버린다 하면 다시 누구에게 애기할 곳이 있으리오마는, 그래도 설마 '자연'만은 그럴 리 없을 듯하여 애원하고 싶었다.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도 또 있겠느냐!'고.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아니 꼭 해야만 할 일이 부지기수이다. 게다가 내 눈이 겨우 좀 뜨이려고 하는 때이었다. 예술이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인생인지, 조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는 이리 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결코 타인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결혼 생활을 싫어하던 제일의 조건이던 공상 세계에서 떠나기 싫던 것도 웬일인지 결혼한 후는 그 세계의 범위가 더 넓고 커질 뿐이었다. 그러므로 독신 생활을 주창하는 것이 너무 쉽고도 어리석어 보였다. 또 결혼 생활을 회피하던 2조로 '구속을 받을 터이니까'. 하던 것이 무슨 까닭인지 별안간에 심신이 매우 침착해져 온 세계 만물이 내 앞에서는 모두 굴복을 하는 것 같고 조금도 구속이 없었다. 


-= 모 된 감상기/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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