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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Apr 06. 2020

돈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부자가 되려는 여성의 이야기를 만나기 어려운 이유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노벨문학상을 타면서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릴 때는 손이 가지 않던 책을 이번에 읽게 되었다. 나같이 자극적이고 선명한 서사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조금 김이 샐 수도 있다. 조마조마하며 여러 챕터를 훑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전쟁의 '참상'은 피비린내나는 묘사로 떠오르지 않았다. 덤덤하게 40년 전보다 40년도 더 된 과거를 조금씩 드러내는 목소리들만 남았다.


 

그건 글자가 아닌 음성이었고, 독백이 아닌 대화였다. 불에 그을려 사라질 수 있는 핏자국이 아니라 한때 얼어붙었더라도 언제든 다시 흘러내리는 물줄기 같은 것이었다. 눈물이었고 식은땀이었고, 다른 생명체로 이어지는 양수 같은 것이었다. 전쟁이란 서사는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어떤 위압도 될 수 없지만, 여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서사는 달랐다. 여성이란 존재를 기억하고 싶은대로 편집한 전쟁의 승리는 반쪽자리여서 그렇게 내 머릿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나보다.

 소련군 2천 만 명이 희생된 승리였지만 우리는 위대한 미국의 함대만 떠올린다. 소련군 안에서도 기억되지 못했던 여군들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소년병'이란 단어에는 없는 빨간 줄이 '소녀병'이란 단어엔 그어지는 것을 보면서 80년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전쟁은 여성의 존재를 지워버리려고 싶어 한다. 전쟁이란 반드시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 것이고, 여성은 언제까지나 생명을 살려내고 길러내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죽여서까지 무언가를 손에 넣거나, 완전한 존재로 충분히 성장하는 일은 여성의 몫이 아니다.


 전쟁에서 조금이나마 역할을 하는 여성은 새하얀 앞치마를 두룬 나이팅게일로 묘사된다. 하지만 포탄이 떨어지는 전선에서 바닥을 기어 참호 속에 널부러진 부상병을 꺼내 구호 천막으로 돌아오는 일을 흰색 치마를 입고 할 수 있을까? 너무 일찍 전쟁에 나와 여성의 속옷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는 소녀병들이 있었다. 어느 날 자신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피를 부상당한 것이라 착각한 여군도 있었다. 부대를 위해 걸핏하면 울어대는 자신의 갓난아이를 물에 담근 어머니 병사도 있었다. 최전선엔 나서지 않았다고? 어떤 군인보다 많은 적군을 쏘아 맞춰 훈장을 받은 나이 어린 소녀도 대전차를 몰던 여군도 있었다. 썩은 사지를 잘라내 품에 안아 옮기거나 터진 내장을 바로잡는 지극히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을 했던 것이다. 하지 않았던 것도, 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던 모습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편집되었을까.


  "나는 시인이 아니라 그저 여자일 뿐이야. 여자로서 나는 나만의 돈을 벌길이 없어. 생계를 유지하거나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안돼. 설사 나만의 돈이 있더라도 결혼하는 순간 그 돈은 남편의 것이 되고 아이를 낳는다면 그건 내 아이가 아니고 남편의 아이가 될 거야. 그러니 거기 앉아서 결혼이 경제적 제안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마. 왜냐면 그게 사실이고, 너(로리)한텐 아닐 수 있어도, 나(에이미)에게는 확실히 그러니까"

                                                                                                                               -   에이미, <작은아씨들>

    

 여자로서 부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여자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경제적으로 누구보다 우월해져야 한다는 욕망은 제한된다. <작은아씨들>이 쓰여진 시대로부터 150년도 더 흘렀지만 돈에 대한 여성의 주도권은 아직 전쟁에 대한 것만큼 허술하다. 여자는 가방을 사거나, 먹을 것을 사거나, 돈 많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치장할 물건들을 사모으는 정도로만 부자이면 된다. 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여성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운 것처럼 자기 한 몸뿐 아니라 수많은 타인의 삶을 책임질만큼 경제력을 가진 여성을 상상하기 어렵다. 여성의 자산이란 조의 고모처럼 물려받은 유산이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쉽다.



"그런 글들을 안 쓰니까 안 중요해 보이는 거야. 계속 써야 더 중요해지는 거지"


                                                                                                                             - 또 에이미, <작은아씨들>


 작은 아씨들에서 제일 똑똑한 캐릭터는 사실 에이미다.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여성들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글로 쓰기 전까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여성은 전쟁 뒤 평화의 수호자, 깨끗한 간호사의 이미지로 충분했다.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남성의 승리와 남성의 고통과 남성의 훈장 뿐이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라는 책이 출간되기까지 또 20년 넘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책이 노벨문학상을 타기까지 또 2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계속해서 인터뷰를 하고, 글감으로 다듬고, 문장을 써내려가야 중요해진다. 이 기록물과 또다른 기록물인 영화를 함께 엮어 이야기하는 나의 글도 전쟁터에서 싸우는 여성과 압도적인 경제력을 가진 여성의 이야기를 좀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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