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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Aug 10. 2020

다음 주에 또 갈 곳으로 여름휴가를 간다는 건,

휴가의 마침표를 찍지 않아도 된다는 것


 17개월째 비행기를 타지 못한 우리는 기왕 이렇게 된 거 극성수기에 휴가를 다녀오자고 마음먹었다. 오른 비행기 값이나 사람 붐빌 것이 두려워 피해왔던 7말 8초에 우리는 강원도 별장으로 긴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8박 9일 동안 우리는 매일 동남아 휴양지에서 쓰는 만큼의 돈을 썼다. 유럽이든 동남아든. 하루 얼마를 쓰느냐가 만족도를 좌우하는 것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폭풍우를 뚫고 회센터에 들어가 횟감을 떼다 먹고, 날이 맑은 저녁에는 위스키를 보틀로 시켜 마시고, 뭔가 지루하다 느껴질 땐 사람들이 줄 서 있는 '힙플'에 슬쩍 끼어서 관광객 놀이를 하려니 돈이 좀 깨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신혼여행도 가지 못한 우린 분풀이하듯 자고 먹고 마시고 헤엄쳤다. 휴가에서 돌아온 지 2주째인 오늘도 어깨 죽지에서 허물이 벗겨지는 걸 보니 태국 치앙마이 못지않게 여름의 태양을 만끽하고 돌아온 게 분명하다.


 8박 9일의 국내여행. 그것도 한 지역에 머물면서 보내는 시간을 가져본 게 얼마만인가. 대학 다닐 때 제주로 게하 스탭을 일했을 때 빼고는, 내일로 여행을 할 때도 해보지 못한 '장기' 여행이었다. 하지만 강원도 양양에는 우리보다 훨씬 긴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발에 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달리는 열차에 뛰어든 느낌이었다. 그곳의 밤은 주말과 평일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물과 햇빛과 비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저녁때가 되면 나무 테이블에 모여 앉아, 부산에서 이자카야를 하다 올라왔다는 사장님의 요리를 기다린다. 스탭에겐 원가로 제공되는 소주와 맥주가 창고 한편 냉장고에서 끊임없이 꺼내지고, 슬리퍼 던지기, 펭귄 얼음깨기 술 게임에 잔은 계속 비워진다. 이곳은 우리가 오기 전에도 우리가 떠난 뒤에도, 또 다음 주에 다시 찾아갔을 때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핑을 배우러 찾아온 새로운 손님들의 이야기가 변주되고, 근처에 새로 문을 연 클럽에 스피커가 1억짜리라더라 그런 시시콜콜한 뉴스가 이어졌다.


 사실 아직 휴가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의 연차는 그만큼 확실히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나의 휴가가 줄었다거나 지나가버렸다는 아쉬움이 없다. 열흘 가까운 낮과 밤을 그곳에서 보내며, 언제 다시 가도 볼 수 있는 얼굴들이 하나 둘 늘었다는 이유가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당장 휴가 다음 주말에도 양양에 다녀왔고, 금요일 밤샘 근무를 했던 바로 지난 주말에도 당일치기로 바다에 다녀왔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터널을 지나면 그곳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옷을 갈아입고 바다에 들어가 파도를 쫓다가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오늘 바다는 어떻다더라 이야기만 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지나친다. 즐겁게 놀았다 싶으면 하루든 반나절이든 상관없다.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시간에 움직이면 서울과 양양을 오가는 일도 그리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번뿐인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반복과 변주에서 오는 리듬이야말로 진정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한 번으로 끝나버린 것엔 언제든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몇 번이고 다시 만날 수 있는 장면은 그 스스로가 끊임없이 의미를 쌓아간다. 이제 4번째 여름을 맞는 양양에서의 시간이 그렇다. 나의 휴가는 2017년 여름부터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첫 해에는 원데이 수업을 들었고, 그다음 해에는 별장을 구했고, 조금씩 샵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익혔다. 근방에 유명하다고 하는 맛집은 한 번씩 다 둘러보았고, 우리 나름의 '제대로 된 맛집 리스트'와 '줄을 서지 않고 최고를 즐기는 노하우'를 쌓았다. 조만간 양양 입문자들을 위한 투어 프로그램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가까운 지인부터, sns를 통해 연결된 누군가까지 우리가 누려온 것들을 시행착오 없이 즐길 수 있도록 가이드 역할을 해보려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재밌지만, 나중에 나이가 좀 더 들고 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잔뜩 알고 있는 여행 가이드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시사철 휴가의 점과 점을 이어나가다 보면 언젠가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 나를 뿌듯하게 여길 날이 오게 될 것 같다. 그리도 오는 주말 나는 또 휴가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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