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1 스파링 시작
이제는 실전이다
운동이 조금 힘들어질 거라는 코치님의 말은 바로 다음날 실현됐다. 스트레칭-줄넘기-섀도우 복싱 2세트를 한 뒤 "자 이제 링 위에 올라가볼께요". 대회에 나간다고 했으면, 누군가와 경기를 한다는 뜻이고, 당연히 링 위에 올라가 누군가를 상대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멍해졌다. 내가 진짜 링 위에 올라가서 누군가에게 주먹을 휘둘러야 하는 건가.
상대는 처음 보는 중간 체격의 남자분이었다. 지난 9개월 동안 링 위에 올라간 건 다 합쳐도 3번인가? 거칠게 숨만 몰아쉬다 내려왔다. 이제는 마음가짐이 달라졌으니, 연습이 아닌 실전이라고 생각하자. 코치님이 헤드기어까지 씌워주니까 내가 정말 '대회'에 나가게 되는구나 실감이 났다.
"코치님이 헤드기어까지 씌워주는 거 처음봤어요"
"아 000회원님 내년에 생활체육대회 나가신대요"
"아...!"
멀리서 다른 회원이 하는 대화가 귀에 꽂혔다. 혼자 연습할 때 끼던 글러브보다 조금 더 묵직한 둥근 글러브를 차고 드디어 링 위에 올라갔다. 공이 울리고, 주먹을 한번 부딪히고 3분의 시간이 시작됐다. 마음은 달라졌는데 몸은 그대로였다. 거울 앞에서는 이제 눈감고도 할 수 있겠다 했던 스탭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왼쪽 손을 계속 눈 높이에 올려두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왼쪽 팔 근육이 떨려왔다. 오른손 주먹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팔은 부들부들, 호흡은 이미 과호흡을 넘어 온통 내 숨소리만 들렸다.
난생 처음으로 스파링을 했을 때 기억을 떠올려 본다. 몇달 동안 주먹을 뻗는 자세를 연습하고, 나름 소리나게 샌드백을 쳐왔으면서 진짜 사람을 앞에 두니 몸이 바짝 굳어버렸다. 내가 사람을 때릴 수 있다니. 누군가를 향해 주먹을 내던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얼굴을 때려야 하는지. 아니 때려도 되는지. 배를 맞춰도 되는지. 맞으면 나한테 화를 내지 않을지. 당최 복싱을 한다는 사람이 주먹 하나 못 휘둘러서야 뭘 배웠다고 할 수 있을지 당혹감이 들었다. 상대방은 내 주먹을 온전히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난 결국 유효타 한방 때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내려왔다.
그때와 달라진 건 코치님이 날 정말 싸우게 만들려고 마음 먹었다는 것이다. 팔이 내려가면 다시 올리라고, 주먹이 나가는 수가 줄어들면 더 많이 휘두르라고. 호흡이 지나치면 걸으면서 숨을 다듬으라고.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그 말이 신호가 되어 나도 모르겠다 우다다다 주먹을 뻗어보았다. 빨리 이 고통스러운 끝났으면 하는 마음과 그래도 한방은 제대로 맞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오락가락한 3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다음 3분도 어찌어찌 지나갔다. 혼자서 연습하는 2라운드랑 완전히 다른 시간이었다.
"생활체육대회는 원투만 제대로 쳐도 이길 수 있어요"
훅을 날리고 더킹해서 어퍼를 치고, 그런 건 아직 먼 훗날의 일일지 모른다. 지금의 나는 6미터 x 6미터 크기의 링 위에서 두 다리로 서서 멈추지 않고 원투 주먹을 내뻗는 것만으로 기절할 것 같이 지친다. 왼손을 제대로 들고 버티면서 들어오는 주먹을 쳐낸다. 그리고 내 사정거리 안에 상대방이 들어오면 안정된 자세로 오른 주먹을 뻗는다. 대회까지 2달 조금 더 남은 지금 내가 익숙해져야 할 첫번째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