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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Dec 15. 2020

조기 은퇴를 위한 첫번째 선택

'몰스킨'에서 '양지 다이어리'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메모 덕후였던 나는 매년 이맘때쯤 빠지지 않고 다이어리를 구입했다. 학생 때는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 서점에 가서 ‘양지사 다이어리’를 샀는데, 한손에 두툼하게 잡히는 365일 일간 다이어리였다. 종이 한 페이지마다 귀퉁이에는 유대인 격언 같은 것이 한문장 씩 적혀 있었고 고등학교 졸업까지 힘들 때면, 비록 수만 개의 다이어리에 똑같이 인쇄된 글자일 뿐이지만 가지런히 적혀 있는 그 문구가 위로가 되기도 했다.


  대학생이 되어 과외비를 받게 되면서 내 다이어리는 '몰스킨(Moleskine)'으로 바뀌었다. 2만원에서 3~4만원은 가볍게 넘기는 나름 고가의 다이어리였는데 그 특유의 디자인과 ‘헤밍웨이가 썼다더라’는 광고 문구가 나를 입덕시켰다. 그렇게 벌써 10년 가까이 매년 이맘때 몰스킨 다이어리를 신중하게 고르는 데 며칠 마음을 쏟았다. 하지만 파이어족이 되기로 결심한 올해 2020년 연말에 나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2만 후반대의 2021년도 몰스킨 다이어리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빼었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가장 싸게 파는 온라인 사이트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격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얼마라도 더 모을 수 있을까 숫자씨름을 하는 주말을 보내고 나니 그런 마음은 더 커졌다. 1년 내내 손때가 묻게 쓸 건데 눈 딱 감고 사자 생각하면서도 또 그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다이어리는 필수지출인가 그렇지 않은가.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나절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2021 양지다이어리 유즈어리25Tw’를 위메프에서 구입했다. 배송비 포함 9천 520원이라는 최저가를 찾기 위해 한 시간 가까이 네이버 쇼핑을 뒤졌던 것 같다. 스타벅스 다이어리나, 회사에서 나눠주는 다이어리도 별 거리낌 없이 잘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꽤 오래된 습관으로 내게 가장 익숙한 포맷의 다이어리를 포기하는 것은 내게 작은 결심이 아니었다. 내 생각보다 다이어리가 너무 크거나 종이가 너무 얇거나 하면 어쩌지. 2021년 일년 내내 후회하며 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나 포기하기 어려운 소비가 있다. 와인과 초콜렛, 스시 오마카세, 계절마다 떠나는 해외여행, 자동차일수도 있고, 보고 싶은 콘서트나 공연 티켓일수도 있다. 몰스킨 하드커버 포켓 다이어리는 나에게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결코 포기할 수 없다거나 포기해선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올해의 나는 조금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다이어리 한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둘씩 더 늘어갈 수 있겠구나 싶다. 그 과정에서 나는 어떤 균형점을 찾아가게 될까. 파이어족 입문자의 12월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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