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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Feb 05. 2016

은퇴전야 -  EBS 프레임 인

'이해'를 위한 '여유'


 공모전 UCC 영상을 완성했다. 체스 판을 도로로 체스 말을 자동차와 보행자로 비유했다. 배경음악과 나래이션이 깔렸고, 우리 팀 나름대로는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는 영상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성본을 본 선생님께서는 처음부터 '다시' 볼 것을 주문하셨다. 화면과 소리 모두 너무 빠른 속도로 지나가버린다는 게 문제였다. 이걸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하기 위해선 중간중간 더 많은 '여유'가 필요했다.


수정본에는 훨씬 더 많은 '정지 화면'과 '느린 속도'의 영상이 추가되었다. 스토리라인은 변하지 않았지만 지나가다 한 번 쳐다본 사람도 대충 이해할 수 있을만큼 친절해졌다. 체스판과 체스말의 은유는 제작자인 우리에게나 익숙한 것이다. 수없이 돌려보고, 화면을 구성해본 우리들에겐 1초짜리 프레임도 단박에 이해 되었다. 하지만 딱 한 번.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와중에 휙- 스쳐지나가는 영상의 다양한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낯선 화면의 의미를 캐치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친절한 안내가 필요하다.


 은퇴를 맞이하는 정년의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생 한 번뿐인 중요한 순간이지만, 의식하지 못한 사이 코앞에 닥쳐온다. 더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전에 내 자리는 사라진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대체 그동안 왜 준비를 안 한 것인지. 자기 비하와 함께 잡념은 많아지지만 그것을 정리하고 이해할 겨를은 없다. 가장인 내가 당장 일을 멈추면 가정이 무너진다는 두려움에 잠을 설친다. 그렇게 쫓기듯 다시 찾은 일자리는 또다시 은퇴 이후의 삶을 이해할 시간을 빼앗아버린다.


@ 셀프다큐 프레임 인 마지막 시리즈


 EBS 기획 시리즈 <프레임 인_은퇴전야>은 55년생 양띠 남자 10명의 사연을 담은 프로그램이다. 2015년이 정년인 이 10명의 가장은 '퇴직 108일 전', '퇴직 46일 전' 그리고 '퇴직날 당일'과 같이 시간 순서대로 화면에 등장한다. 하루하루 일할 수 있는 날짜가 줄어들면서 주인공들의 고민은 더 빠른 속도로 현실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기대했던 재계약 연장은 무산되고, 아내의 수술로 예상치 못한 목돈이 필요해지고, 아파트 값이 폭락해 전에 살던 집보다 비좁은 곳으로 이사가게 된다. 사업을 하는 또래 친구들을 만나 퇴직 후 밥벌이에 대해 조언을 구하지만. 결국 '각자 잘 살아보자'로 인사말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카트린느 니케즈 엘리자베트 르루, 동일 농장에 오십사 년 간 근속 표창. 이십오 프랑 상당의 은메달 한 개!>

곳간의 먼지, 빨래 잿물, 양털의 기름때로 너무나 거칠어지고 트고 굳은 살이 박힌 두 손은 깨끗한 물로 씻고 왔는데도 여전히 더러워 보인다. 그리고 일을 너무 했기 때문에 반쯤 펼쳐진 채 오므라들 줄 모르는 그 손 자체가 그때까지 견디어온 무수한 고통을 겸허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딘가 수도자와도 같은 완고함으로 인하여 그녀의 얼굴 표정이 돋보였다. 두 눈은 웬만한 슬픔이나 감동으로는 결코 녹일 수 없는 푸른빛이었다. 오랫동안 가축들과 함께 어울려 지낸 나머지 그녀는 가축들처럼 말이 없고 덤덤해져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나서 보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숱한 깃발들과 북소리와 검은 예복 차림의 신사들과 참사관의 십자훈장에 마음이 헷갈린 그녀는 앞으로 나가야 할 것인지 도망쳐야 할 것인지, 왜 군중들이 자기를 앞으로 떠밀어내는지, 왜 심사원들이 자기에게 미소를 보내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그냥 꼼짝도 않은 채 서 있었다.

 이리하여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이 부르주아들의 면전에 '반 세기에 걸친 이 노예 생활'이 불려나와 서 있는 것이었다.
-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54년, 반 세기에 걸친 노예 생활이 이십오 프랑 상당의 메달로 청산되었다. 주어진 일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이 여인은 평생에 처음 받는 상을 받으러 나가는 일조차 여유롭게 해내지 못한다. 자신의 인생이 흘러가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유가 필요하다. 충분한 시간 동안의 정지 화면과, 들이닥치는 변화를 조금 느린 화면으로 볼 수 있는 여유 말이다.


 매 순간, 매 시기가 생전 처음 있는 일인 개인에게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케이블 설치 기사였던 한 남자는 자신이 동료들을 따라 노조에 가입했다가 수십년만에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규직'이 된지 1년만에 이번엔 '정년'을 맞이해 회사를 떠나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뭣 모르고 노조를 따라갈 때는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 생각이나 했을까. 개인은 할 수 없지만 국가는 할 수 있다. 개인의 일생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삶은 오랫동안 기록되어 왔고, 이에 따라 예측과 대비가 가능해졌다. 국가는 개인이 은퇴 후 인생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은 마음의 여유와 물질적 여유를 아우르는 실질적인 지원이다.


@ 은퇴전야- 38년 경찰 생활 후 퇴직하는 주인공


우리집 거실엔 일본식 탁자 난로 '고타츠'가 놓여있다. 서로 아무리 바빠도 하루 삼십분은 세 가족이 이 탁자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는 56년생 올해 정년을 맞이할 연세이시다. 오늘 저녁 아빠는 얼마 전 내가 브런치에 남긴 '청년배당'에 대한 글을 보고 평소 본인의 생각을 바꾸게 되셨단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은퇴전야>를 보면서 아빠 생각을 많이 했다. 요즘 들어 부쩍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시고 잠을 설치는 일이 많으셨다. 이렇게 서로의 입장에서 프레임을 바꿔볼 기회 역시 인생의 새로운 단계를 준비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여유'라고 생각한다. 나의 20대와 아빠의 60대 모두 각자 난생 처음 겪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정지 화면'과 '느린 재생 화면'을 추가할 기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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