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과 디지털 심리정치
매일 4~50 언저리를 찍던 조회수가 세자리 수로 뛰어 올랐다. 어젯밤에 썼던 '청년배당' 이야기에 공감하는 백수들이 많았던 걸까? 그저께 저녁에 썼던 '예비후보 경선'에 관한 이야기가 결과 발표와 함께 다시 주목을 끌었던 걸까? 정답은 둘 다 아니었다. 브런치를 시작한 이후 조회수의 신기록을 세워준 글은 영화 <내부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유입 경로는 '카카오 채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카카오톡 서비스를 이용하던 중에 이 플랫폼을 타고 내 글을 읽게 된 것이다.
서스펜스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명명한 흥미로운 영화 요소가 있다. 속임수, 미끼라는 뜻을 가진 '맥거핀'이다. 관객들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고안한 장치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대상일지라도 영화의 시작부터 반복해서 보여준다. 사람들은 흔히 클로즈업 된 화면,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피사체에 시선을 붙잡힌다. 그리고 이 물건이 중요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단정짓게 된다. 하지만 결국 맥거핀은 전체 이야기와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갖고 맥거핀을 쫓던 관객들은 맥이 풀린다. 자신이 감독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영화 <싸이코>의 '돈봉투'와 <미션임파서블>의 '토끼발'이 대표적인 예다.
조회수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 일종의 '맥거핀'이다. 콘텐츠가 가진 의미와 그것을 완성하기까지의 노력, 콘텐츠의 완성도는 조회수과 별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는 콘텐츠가 유통되는 경로, 플랫폼과 채널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조회수를 신경 쓴 소재는 대중의 주목도를 타고, 플랫폼의 성격을 고민하고, 글의 완결성보다 '시의적절성'을 더 따지게 만든다.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미디어 빅뱅 시대 플랫폼 별로 체계적인 전략을 짜는 노력은 필요하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조회수에 좌우되지 않고 일관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있다.
사회학자 한병철은 '00사회' 시리즈의 세번째 글인 <심리정치>에서 '친절한 스마트권력은 침묵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온라인 세계에서 원하는 만큼 이야기하고, 차곡차곡 쌓인 디지털 정보들은 개인의 행동을 미리 파악하는 데 쓰인다. 개인 정보가 개인의 행동에 앞서 행동하는 셈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이 스스로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에 대한 무수한 정보를 공개한 개인은 거대 플랫폼의 알고리즘에 의해 편집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채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굉장히 좁은 시야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플랫폼이 제공하는 정보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관점을 유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자 <한국일보>의 기획 기사에서는 '뉴스 가치'는 누가, 어떻게 정할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기사에 따르면 아담 샤프 트위터 뉴스팀 디렉터는 "좋은 기사가 반드시 조회수가 높은 것은 아니다"라며 "뉴스는 재미있고 잘 읽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에디터가 필요하다" 라고 했다. 양적인 선호도 위에 질적인 가치 판단이 더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이와 함께 플랫폼의 한계성을 지적했다. "한국인 이외에 한국 언론사를 팔로우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기계가 자동으로 인기 기사를 선별해 보여 주면 세월호 관련 콘텐츠를 전혀 볼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며칠전 한겨레 신문에서 봤다.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은 <(미국은) 동아시아를 볼 수 없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미국 3대 주요 텔레비전 방송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시청자들은 동아시아 뉴스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동아시아의 어떤 뉴스도 상위 20위권에 들지 못했다. 그는 뒤이어 "미국인들이 일본 교과서 문제에 대해 분노하지 않거나 중국 경제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또한 뒤틀린 남북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미국인들이 동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말하지만, 그전에 일단 '보이는 것'을 보게 된다. 조회수를 높이려는 플랫폼 알고리즘에 속지 않고 양질의 정보를 얻으려면 개인이 좀 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즐겨본 적 있는 음악만을 평생 즐기게 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다양한 것을 받아들이는 '감성 근육'을 키울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소한 모바일 콘텐츠부터 데일리, 국제 뉴스까지 개인이 플랫폼을 세심하게 선택하는 역량이 곧 그 사람의 지평을 넓힌다. 평소 일상적으로 접하는 플랫폼의 수준을 때때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히치콕의 '맥거핀'은 '속았다'는 느낌과 함께 자신의 근거 없는 확신을 성찰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사물에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하여, 영화 속 권력자인 감독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즐겨 찾는 플랫폼에서 제일 먼저 보여지는 콘텐츠의 다양성과 깊이가 내 관점의 그것을 가늠할 지표가 된다.
한병철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좋아요' 민주주의"다. 자신의 입맛에 껄끄러운, 익숙하지 않는, 복잡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는 애초에 손을 대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에 깊은 긴장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주간지 시사인에는 작년 10월부터 이미지를 최소화하고 활자만 빼곡하게 적은 문정우 기자의 '활자의 영토'라는 칼럼이 게재되었다. 모바일 웹 이미지가 직관적으로 전하는 메시지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읽기 시작하는 것부터 부담스러운 콘텐츠다. 그러나 그런 껄끄러움, 부담스러움을 일정 부분 인내하고 받아들인 텍스트야말로 우리 생각과 영혼을 고양시킨다.
"그 긴장이 영혼에 심어주는 강인함. 불행을 버티고 견디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창의성과 용기. 그것을 영혼은 괴로움 속에서, 엄청난 괴로움의 훈육 속에서 선사 받지 않았던가?"
-Friedrich Nietzsche: Jenseits von Gut und Böse[Beyond good and ev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