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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Jun 05. 2024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죽였을 수도 있다

넋 놓고 읽었던 <홍학의 자리> 

     

  중학생이던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였다. 밤이 새도록 책을 읽은 첫 번째 경험을 하게 해준 책은 <바리데기>였다. 그 다음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향수>가 그랬다. 끝까지 읽어야 할 이유 없이 그저 재밌어서 잠을 쫓았던 오래 전 기억들이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목적 없는 책읽기는 없었고, 대학에 들어가고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언제나 ‘읽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서른 다섯 늦은 봄, 20여 년 전 그때처럼 소설에 빨려 들어갔다.      


 언니가 <우리집은 도서관> 어플을 소개해주었다. 엉덩이가 무거워 도서관은 가기 어렵고, 뭐가 재밌는지 모르면서 무작정 책을 사들이기도 부담스러운 내게 딱이었다. 적당히 재밌어 보이고 적당히 인기가 있어 보이는 몇 권의 책을 담아 적당한 대여료를 결제하면 집 앞으로 책들이 배달된다. 대여섯 권 중에 재밌는 책이 한두 권만 있어도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일요일 오전, 침대에 늘어져 펼치게 된 책이 <홍학의 자리>였다.      


 붉은 홍학. 사실 책의 표지에는 홍학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흰색 의자 아래 핏빛 웅덩이가 고여 있다.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붉은 홍학의 이미지가 마치 홍학이 거기 그려져 있었던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한 중학생의 죽음으로 시작된 이 소설은 마지막 장까지 내가 보고 있던 것이 진짜인지 다시 확인하게 만든다. 글로 적혀 있지 않은 정보를 내 뇌가 저절로 끼워 맞추다가 결말을 보고서야 나의 편견이 만들어낸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선생님과 불륜을 저질은 한 학생의 의문스러운 죽음. 범인이 누구인지 너무나 분명해 보이다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수록 전혀 다른 인물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스포를 할 수 없지만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불륜의 당사자인 교사이다. 자신과 사랑을 나눈 학생이 하룻밤 사이 죽어나갔는데 자기가 범인으로 지목될까 전전긍긍하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그의 아내가 범인일까, 학교의 경비원이 범인일까. 또 다른 누군가일까. 아님 그 자신인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집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의 방향이 달라지는 일요일 한나절의 시간이 하릴 없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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