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로맹가리
생모가 자기 자식을 키우지 못하는 시대가 있었다. 어머니가 몸을 팔아 돈을 번다는 이유로. 1970년대 파리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그렇게 맡겨진 한 아이의 이야기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언제부터 눈물이 차올랐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이유 없이 슬픔이 밀려온다. 생이 밀려온다. 생의 무게와 그 무게에 짓눌려 살아야만 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열 네 살의 소년이 104살의 노인과 겹쳐보였다. 그의 생은 벌써 그만큼의 자기희생을 거쳐 사랑의 화석이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얼마나 오래 만났는지,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눈을 돌리고 도망치고 싶을 만큼 괴로운 상대의 현존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가는 의지야말로 사랑의 가장 큰 정의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소설의 시작부터 나는 줄곧 모모가 도망쳐 돌아오지 않길 바랐다. 어린 아이이면서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의 똥을 닦고 돌봐줘야 하는 그의 인생이 행복해졌으면 했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벗어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만나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어머니 역할을 대신해줄 수 있는 여성들’을 따라 떠났으면 했다. 매일 8층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10살짜리 꼬마를 의지하는 유태인 아주머니의 곁에서는 어떤 행복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배부르고, 즐겁고, 안락한 삶을 위해서라면 이기적이지만 자기 살길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모모가 머무르는 집에는 창녀의 자식들이 계속해서 맡겨지고,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로자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병색이 깊어지고,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계속해서 짙은 화장을 하고, 야한 옷을 입는다. 같은 건물에 사는 트랜스젠더 이모가 돌봐주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다. 하루 종일 고전과 기도문만 외우는 옆집 노인이 그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지식이 많은 어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집을 떠나는 것이 무조건 옳은 방법이 아닌가.
하지만 모모는 떠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지만, 로자 아주머니의 마지막을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서서히 죽어가는 몸을 지하실로 이끌고 내려가 사람들이 모르는 3주의 시간 동안 시신의 곁을 지켰다. 로자 아주머니가 생전에 좋아하던 모양대로 화장을 해주고,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을 싫어할까 몇 번이고 시장에 가서 향수를 사다 뿌려주었다. 모모는 로자 아주머니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졌으면 했다. 엄마, 아빠의 얼굴을 모른 채 세상에 홀로 버려져 그의 세상이 오직 로자 아주머니 뿐이었기에 떠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열 살이든, 열 네 살이든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상력과 용기가 부족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모 스스로가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그 아이의 선택과 생 그 자체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생의 가치를 보여준다. 나는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 같지만, 누군가는 그런 삶을 살아낸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의 무게를 누군가는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타인 앞에 놓인 생의 무게까지도 함께 짊어지는 것이 가능한 삶이 있다. 이 글을 적으면서 그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물이 다시 차오른다. 기독교 신자들이 십자가를 불자들이 석가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마지막 몇 페이지에 묘사된 장면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세상 모든 사랑의 정수가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