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지숙 Feb 15. 2016

안개 속 정글을 살아가는 법

평범한 '월급쟁이'들의 무대, 뮤지컬 <정글 라이프>


 강변에 안개가 자욱했다. 매일 달리던 길 위에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안개 속을 불안하게 달리는 중 코를 찌르는 냄새가 있었다. 무언가를 태우는 냄새, 물가에서 올라오는 불쾌한 냄새였다. 이렇게 흐린 날씨엔 공장에서 몰래 폐수를 방류하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달리는 중 사방에서 덮쳐오는 악취들. 이런 곳인 줄 알았다면 마스크를 챙겨 나왔을 것이다. 달리던 습관대로 코스를 완주하고 나오니 목에 칼칼함이 느껴졌다.


 두 달만에 그만둔 광고 회사의 인턴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는 매일 안개가 낀 강변을 걷는 기분이었다. 맡겨진 일의 리스트를 지워나가면서도 항상 쫓기는  듯했는데, 생각해보면 엑셀 화면 위의 일이 아니라 사내 메신저와 메일 때문이었다. 내 위로 층층이 쌓인 직함들을 외우고, 다른 팀과의 업무분담, 광고주와의 커뮤니케이션 모두가 내게는 처음인 낯선 일들이었다. 어느 날에는 내가 광고주 측 요청에 곧바로 답장을 하지 않아 큰 문제가 생겼다. 어떤 사과나 보상으로 쉽게 없었던 일이 되지 않는 '예의'에 관한 문제였다. 어떤 실수를 했을 때 보다 가장 크게 혼이 났다. 내가  사회생활의 ABC도 모르고 이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 정글의 포식자들에게 둘러쌓인 핏덩이 신입


 누구의 말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할까. 어떤 일에 가장 열심히어야 할까.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처럼 더듬거리고, 허둥대다 제풀에 지쳐버리는 나 자신이 창피했다.


중요한 건 바로 '위!'  

 옆도 아래도 아닌 바로 '위!'


 뮤지컬 <정글라이프>는 안개 속 정글 사회의 면면을 보여준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자욱한 안개가 무대 위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대 뒤편의 드라이아이스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가짜'이지만 충분히 실감 나고 실체가 분명했다. 무대 위의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빌딩 숲 속 정글 먹지 않으면 먹히는 곳!' 사실 소개문을 보고 공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진짜 월급쟁이 생활은 얼마 해보지 않았을  연극배우들이 '리얼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뻔하고 과장된 이야기로 관객들을 지루하게 하진 않을까. 하지만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 '허구의 이야기'가 지닌 힘과 가능성을 충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정글라이프>는 안개 속 정글을 살아가는 여러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요한 건 바로 '위!'이며,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낙하산 상무에겐 아버지의 인정이, 가정까지 포기한 부장에겐 회사에 뼈를 묻는 것이 목표다. 클럽 여왕벌인 대리는 재벌가와의 결혼을 꿈꾸고, 일신의 안녕을 위해 사람들의 약점을 수집하는 사원은  한몫 크게 챙겨 회사를 떠날 생각을 한다. 모두가 자신이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성공, 나의 비상, 나의 안전'이다. 먹지 않으면 먹히는 사회에서 그들 각자의 선택은 가장 합리적이고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인 신입사원 피동희의 선택은 달랐다. 핏덩이 같은 막내로 회사의 잡일은 다 떠맡던 그는 '성과는 위로, 책임은 아래로' 구호에 따라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혼자 책임지게 된다. 그가 대박 낸 아이템 기획안을 두고 회사 내 암투가 벌어지는데 피동희는 '위!' 대신 옆과 아래를 두루 살피는 길을 택한다.


 사실 모든 설정이 허구적이다. 그들이 택한 배경이 영리하게 사회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하더라도, 회사의 부정을 폭로하고 새 직장을 구하는 신입 사원의 선택은 여전히 '동화 속 이야기'와 같다. 약육강식의 잔혹함과 부조리를 체험한 모든 사람이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월급쟁이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계속해야만 하는 어떤 사람도 '영웅'으로 죽기보다 '평범함 사람'으로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란다.


 중요한 건 경쟁 사회에서의 '선택'이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같은 사회에 살아간다. 일요일 저녁마다 때려치우고 싶은 회사지만 월요일 아침이면 여전히 '엿같은 하루'를 시작하러 출근한다. 회사 생활이 반복해서 이어진다는 뜻은 어제 내린 선택의 결과를 오늘 달라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회사에서 보내는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내가 살아 남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할 때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번의 경쟁으로 나누어진 승리자와 패배자는 경쟁이 모두 끝난 뒤 각자의 선택에 따라 새로운 관계로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동물의 세계처럼 한번 먹히고 나면 소화되어 똥으로 남는 게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선 승리자도 패배자도 어찌 되었든 계속해서 살아간다.   


@ 정글의 암사자 같은 미란다에게 영향을 받는 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앤 해서웨이가 선택한 결말이 마음에 드는 점은 경쟁을 통해 생존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승리의 부산물이 배분된 뒤에도 여전히 우리에겐 새로운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오랜 동료의 자리를 없애버린 편집장 미란다의 선택을 비난한다. 하지만 앤 역시 어떤 이가 간절히 바랬던 기회를 빼앗아 자신을 지켰다. 어느새 자신이 미란다와 똑같이 잔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앤은 일을 그만두고 나온다.


 여기까지는 <정글 라이프>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게 '동화 속 영웅 이야기' 같다. 하지만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은 그보다 더 별 것 아닌 장면이었다. 회사를 나온 앤은 자신의 선임 에밀리에게 한 통의 전화를 건다. 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에밀리가 몇 달 동안 고대했던 파리 패션쇼에 그녀를 대신해 나갔던 것이다. 앤을 좋게 볼리 없는 에밀리는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아 드는데 앤은 뜻밖의 제안을 한다.


"에밀리,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내 옷장에 파리 패션위크 때 입었던 옷들이 잔뜩 이예요. 그런 화려한 옷들, 앞으로는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에밀리가 나 대신 좀 처분해줄 수 있나 해서요."


 앤은 에밀리가 파리에 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패션위크에서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을 입기 위해 몇 달 동안 치즈 몇 조각으로 연명하며 다이어트를 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앤은 에밀리가 간절히 원한 기회를 빼앗았지만 그녀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다. 모든 결과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로 상대방의 다친 마음을 살폈다.



@ 자신의 일을 간절히 원했던 에밀리

  물론 앤이 회사를 나가면서 에밀리에게 다시 자리가 돌아간 상황이었다. 하지만 경쟁의 결과, 생존자와 패배자가 뒤바뀐 것만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저절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앤은 작은 배려를 통해 단 하나의 정답, 불가피한 선택처럼 보였던 약육강식의 법칙에 새로운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런 적은 가능성을 생각해내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힘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게으름의 문제이다.   


 우리 모두는 안개에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정글 같은 사회를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오직 '위!'이며, 정답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안개 속을 지나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가이드라인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정글은 회사 속 작은 사무실 하나가 아니다. 아마존 정글 밖에는 브라질이란 나라가 있고, 남극과 북극, 사막과 같은 다양한 스케일의 다양한 생존 환경이 펼쳐져 있다. 개인의 생존은 단 한 번의 경쟁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달라진 환경, 더 커진 환경에서 살아남는 방식은 또 다른 원칙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반경을 꾸준히 넓혀가는 '진보하는 존재'이다. 눈앞의 생존만큼이나 지속되는 항구적인 효용에 대해서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자기 발전의 수단은 주로 다른 사람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희생시킴으로써 얻는 것이다. 따라서 이기적인 요소를 억제하면 자기 내면의 사회적 요소를 더욱 발전시키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에 못지않은 것을 새로 얻게 된다.
         - J.S.Mill <자유론>, 122페이지


 앤은 자신의 원래 꿈이었던 저널리스트가 되면서 앞으로 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그녀를 구해준 것은 그녀가 가진 인맥이었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주변 환경에 휩쓸리지 않게 붙잡아준 것은 그녀의 오랜 친구와 애인이었다. 정글 같은 경쟁 사회에서 '이기적 요소'만큼이나 '사회적 요소'가 필요하다. 세상이 각박하고,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짓밟아야 하는 선택이 눈앞의 현실이더라도 수십 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그것을 만회할 기회를 반드시 남겨둔다. 그런 작은 기회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만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부정의를 폭로하고, 회사에 사표를 던지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사회엔 영웅보다 평범한 인간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나는 효용이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효용은 진보하는 존재인 인간의
''항구적인 이익''에 기반을 둔, 가장 넓은 의미의 개념이어야 한다.

- J.S.Mill <자유론>, 34 페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