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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Feb 21. 2016

'인정 욕구'에 솔직해질 것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어쩌면 기록을 쌓기 위해 달린다


 연말에 시작한 아침 달리기 기록이 50번을 채웠다. 브런치에 올린 글도 30편을 채워간다. 모든 것이 데이터 베이스화 되고, 쉽게 공유되면서 개인의 '인정 욕구'는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채워질 수 있는 요즘이다. 매일 아침마다 strava 앱을 이용해 달리기 기록을 재고, 일반 블로그 대신 접근성이 높은 브런치 앱을 사용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결국 보다 용이하게, 많은 이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함이다.  


@ '인정 욕구'는 인간 존재 자체를 정의한다.


 한국에서만 100만 독자를 끌어모은 책,  <미움받을 용기> 역시 '인정 욕구'에 관한 내용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것을 과거의 트라우마로 설명해, 현재를 바꿀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 현재의 모든 나쁜 상황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바로 그 인정 욕구만 버리면 누구나 자신을 긍정하며, 타인을 바꾸려 들지도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루소에 따르면 '인정 욕구를 버리라'는 주문은 인간 존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처방이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평판과 명예와 특권에 대한 일반 욕구"가 모든 불평등의 기원이라 밝혔다. 인간이  '자기완성'과 '정신의 진보'를 추구하는 한 타인의 평판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욕구와 인정 욕구의 갈망은 한 몸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인류가 걸어온 모든 역사는 '인정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명제를 거역하는 건 인간 사회를 떠나 미개한 자연인의 상태로 돌아가겠다는 것과 같다.


@ 우리 모두의 '인정 욕구'에 솔직해질 것


 무엇보다 인정 욕구를 자극하는 '사회적 불평등'은 소유권, 법률, 정치 제도에 의해 끊임없이 강화된다. 개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정 욕구'를 채우고자 시도하면 기본적으로 이를 제지하는 거대한 장벽이 있는 셈이다. 누군가 평판과 명예,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노동과 희생, 그리고 그들의 정신적 노예 상태라는 대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허영과 경멸, 치욕과 선망은 한 몸이자 서로를 성립 조건으로서 필요로 한다. 공동의 선, 혹은 정의와 평화를 외치며, '약자를 강자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선언 역시 결국 개인의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다수를 기만하는 '악덕'인 경우가 태반이다.


 선과 악을 말함에 있어서의 언어적 혼란. 나는 그대들에게 이것이 국가의 징표임을 알린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루소가 묘사한 '자연 상태의 인간' (아직 '인정 욕구'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정도로 확장되지 않은 상태)은 하나의 이상향으로 떠올랐다. 루소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은 반문명, 즉 개인의 일반적인 '인정 욕구'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삶을 모색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는데 멀게는  프랑스혁명, 가깝게는 비트 세대와 히피, 힙스터 문화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정작 루소 자신은 인간이 자연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인정 욕구에 기반한 사회 불평등 구조 즉, 사유 재산과 법률, 정치적 조직체 모두는 인류 정신 속에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고, 진보의 과정 속에서 순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인간 개체는 완성되고, 인간 종은 멸종한다


 결국 인간의 '인정 욕구'를 부정한 반문명 운동은 현실과의 관련성을 잃어버린 채 고립되고 퇴행했다.  프랑스혁명은 앙시앵 레짐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비트 세대와 히피 문화는 한때의 유행으로 끝났다. 문제가 되는 건, 이들 운동이 추구한 '순수성과 진정성, 비상업적인 자아'의 가치가 맹목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소설가 장정일은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란 책을 통해 '진정성의 역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 앤드류 포터는 '타인의 인정에 무관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역설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상업적 마케팅'에 이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유기농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대표 사례로 들었다.     


 타인의 시선을 배제한 순수성, 즉 진정성을 지나치게 쫓는 것 역시 허영이며 위선, 기만일 수 있다.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진정성(다르게 말하자면, '인정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정도)에 집착해 인간 존재의 본성과 사회 현실에서 쉽게 실망하고 등을 돌리는 태도이다. 장정일은 "진정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들이 너무나 쉽게 세계 종말을 이야기하고 비관적이며 어쩌면 신학적인 사고로 빠지기 일쑤"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를 후보자들의 인격, 품성의 결격에서 찾는 태도를 일례로 제시했다.  


@ 진박 찾기가 혐오스럽다고 투표권을 버려선 안 된다

 결국 개인의 '인정 욕구'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양분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해 나간다. 법률, 정치, 경제 제도와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 모두 자신의 인정 욕구를 쫓아 열심히 하루를 살아간다. 내가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고, 웹상에 나의 글을 올리려는 정력과 시간을 쏟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인정 욕구를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그와 현명하게 타협해야 한다. 그런 실제적 노력만이 정치적 혐오와 마케팅의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 법률, 정치, 경제 제도가 개인을 얼마나 기만하고 있는지, 그것을 운영하는 주체들이 가진 '인정 욕구'에 비춰 이해하고, 나 역시 그들과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자. 그런 다음에야 서로의 자유를 최대화하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경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 바라건대 그가 고매한 자를 넘어 고양된 자이기를

 인간은 행복이 아닌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개인이 가진 인정 욕구의 정점에 도달하고자 애쓰면서 동시에 주변 사람들과의 타협점을 찾는 일이야말로 바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이성과 덕만으로 완성될 수 없는 존재이다. 인정 욕구로부터의 자유, 순수한 진정성의 추구는 인간 사회의 현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모든 것을 비관하거나 스스로 변질되기 쉽다. 그보다는 인간의 본성인 인정 욕구에 솔직해지고, 장차 다가올 '위대한 경멸의 순간'을 기대하는 편이 낫다.


 그대들이 체험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경멸의 순간이다. 그대들의 행복, 그대들의 이성과 덕이 역겨워지는 순간이다.

- 니체,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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