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평역 ~ 풍기역 ~ 부석사
마음으로 즐기는 우리의 것 찾기
2016년에 세운 신년 목표 가운데 하나다. 작년 말 오주석 선생님의 <한국의 미>라는 책을 읽고서 한국인이야말로 한국의 것을 제대로 즐기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모종의 의무감이 아닌 어디까지나 마음에서 우러나와 즐길 수 있는 우리의 것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 첫 시작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소백산맥 자락의 오래된 절. 많은 사람들이 그 기둥에 기대서서 무언가를 느끼고 왔다는 절. 언제부터인가 꼭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 생각했던 그곳. 영주의 부석사를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양평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풍기역에 내린 게 오전 11시 40분이었다. 유난히 화창한 날씨에 주변 사방이 조용한 역에서 몇 발자국 걸어나오지 않아 거대한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풍기 - 인삼. 한국지리 책에서 배운 대로였다. 부석사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섰더니 정면에 사오 층 규모의 인삼판매센터가 보였다. 그 뒤쪽 풍경에는 더 믿기 어려운 조형물이 있었는데 인삼 그림이 그려져 있는 높은 타워였다.
부석사는 풍기역에서도 한참을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역에서 몇십 미터 걸어나와 하루 16대 다닌다는 버스를 할머니 한 분과 할아버지 한 분과 함께 기다렸다. 길 건너엔 인삼과 각종 산나물을 늘어놓고 파는 어르신들이 서로 안부를 묻거나 한담을 나누었는데 그 목소리만 가득 울려 퍼질 정도로 역 주변은 조용했다. 정오의 햇살은 따뜻하고 고양이가 도로 위를 어슬렁 걸어 다녔다.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는 깡마른 몸에 하얀색 바탕에 BYC 로고가 새겨진 양말을 신고 계셨다. 버스가 벌써 20분째 오지 않고 있었다. 할머니는 오지 않는 버스를 더 기다리지 않고 어디론가 가버리셨다. 그리고 또다시 15분쯤 흐른 뒤에야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버스는 허허벌판을 달렸다. 논두렁 밭두렁이랄 것도 없는 텅 빈 길 위를 빠른 속도로 지났다. 빠르게 달리는 버스에서 자신이 내려야 할 정거장 이름이 나오자마자 벨을 누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몸이 굼뜬 어르신들께서 벨을 조금 늦게 누르면, 기사님이 짜증을 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딴에는 서둘러 가져온 수레를 내리고 양손 가득 짐을 든 채 내리려는데, 그 속도가 더딘 만큼 기사님 마음이 바빠지는 게 눈에 보였다. 어르신보다 몇 살이나 어릴까 싶은 또 다른 어르신이 짐을 내리는 것을 돕고, '다음에 꼭 집으로 들려'라는 인사만 버스 안에 남았다. 버스에 남은 어르신들은 자신이 내릴 곳이 가까워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느라 조금씩 긴장하고 있는 듯 보였다.
버스에 오를 때 한 외국인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이곳에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낡은 옷과 눌러쓴 모자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이곳에서 다른 나라 사람을 마주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가 이방인-여행자, 그쪽이 '현지인' 신분으로 말이다. 그 사람 옆에도 자리가 비어 있어 그곳에 앉으려 했었다. 하지만 그곳은 해가 많이 드는 자리였고 나는 멀미를 할 것 같아 몸을 돌려 더 안쪽에 있는 그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있다가는 그 청년이 내가 자신을 피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햇빛을 피한 것이라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 청년을 피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부석사 올라가는 길에는 '무량수'라는 한식당이 있었다. 3, 4층의 번듯한 새 건물로 올려진 식당도 여럿이었지만 눈길이 가지 않았다. 무량수 식당은 좀 더 안쪽까지 걸어 들어가는 길에 있었다. 다른 것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나중에라도 부석사 가는 길을 떠올린다면 이 식당의 이름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았다. 12시 30분이 넘은 시간, 새벽부터 일어나 4시간 동안 이동해온 탓에 배가 많이 고팠다. 찌개백반에 몇 가지나물 반찬은 충분히 맛있었다. 혼자 온 여행이지만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니 마음까지 든든해진 기분이었다. 후식으로 믹스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마시니 새삼 여행 나온 기분이 되었다.
식당, 민박집을 지나 본격적으로 부석사 가는 길이 시작되었다. 안내 표지판부터가 잘 관리되고 있는 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이곳을 아끼고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겠지. 꾸밈없이 보기 좋게 또렷한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매표소 앞까지 크고 작은 안내 표지판들이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하러 마중 나온 모양이었다.
1,200원짜리 입장표를 사들고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길의 첫걸음을 떼었다. 이 길에 서려고 얼마나 먼 길을 달려왔는지. 새벽부터 차를 놓치지는 않을까 종종거렸던 생각에 그저 죽 이어진 낙엽길이 더 느껴졌다. 길 양옆으로 사과나무 심은 것이 주욱 늘어져 있었다. 좁은 산길이 부석사로 오르는 일한 길이었다.
나는 무량수전을 보러 왔다. 집 대문을 나오면서부터 줄곧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관문을 지나야 했다. 일주문 천왕문, 범종각, 안양루. 생각보다 가파른 그 길을 단숨에 오르려고 하니 숨이 차올랐다. 저 산 꼭대기에 있는 무량수전이 내 목적지다.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데 거침이 없었고 몇 개의 문과 누각, 석탑을 지나는데도 별 감흥이 없었다. 게임 퀘스트를 깨는 것 같았다. 나는 어서 끝판왕을 만나고 싶어 서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범종각은 내 발걸음을 멈춰 서게 했다.
줄곧 바쁘게 고개를 돌리며, 잰 발걸음으로 올라오다 이 건물 앞에서는 자리를 깔고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은 얼마 없었고 마침 햇빛도 충분히 따뜻해 어디에 주저앉아도 소풍 나온 듯 자연스러웠다. 관람객 출입금지라고 적힌 주변 건물들에서는 보살님들이 윷을 노는 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누각이 어째서 시선을 잡아끌었을까 보았더니 외벽에 색이 하나도 칠해져 있지 않은 나무 그대로였다. 이 건물만 한 나무를 그대로 조각해 정각 모양으로 만들어 둔 듯한 모습이었다.
아직 보수가 끝나지 않은 것인지, 원래부터 이런 모습인지, 색이 바랜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 색도 입혀지지 않은 단정한 누각은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원래 이 자리에 서 있던 나무 네 그루가 어느 날 한 마음이 되어 멋진 건물이 되기로 결정한 것처럼 자연스럽고 멋스러웠다. 햇빛을 받아 밝은 갈색의 건물 외관이 구석구석 눈에 들어왔다. '봉황산 부석사'. 이 절이 소백산맥 어느 자락에 위치한 것인지 말해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안양루에 대해서는 들은풍월이 있었다. 이 누각 아래 계단을 통해 올라서면 마침내 무량수전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 마지막 몇 계단이 가파른 만큼 입구의 천장도 굉장히 낮아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머리가 누각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하다. 석탑 뒤로 조금씩 무량수전의 모습이 드러날수록 찾는 이의 고개와 함께 마음을 점점 낮출 수 있도록 의도된 건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좁은 통로를 지나 도착한 곳에 무량수전이 서 있었다.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