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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Feb 29. 2016

대한민국으로부터 독립을 꿈꾸다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속 ‘개인 독립사(獨立史)'



대한민국은 독립된 주권국가이다. 전작권이 나라 밖에 있고, 기형적으로 산업의 대외 의존도가 높지만 국제법상 “193개국”에 속해 있는 엄연한 독립국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독립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하나의 짧은 독립사(獨立史)를 그린다. 바로 ‘대한민국으로부터의’ 독립이다.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에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줬어

-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금 독립을 요청 중이다. 조국으로부터의 독립, 바로 ‘개인’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하느님이 보우하는 것도, 길이 보전되는 것도 모두 다 ‘대한민국’인 이 나라에서 역설적으로 애국심(愛國心)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나라의 이름을 빛낼 인재가 아닌 평범한 개인들에 게는 지나치게 무심한 이 나라의 국적을 2014년 한 해만 2만 명의 사람들이 포기했다. 이는 한국 국적 취득자보다 5,300여명 많은 숫자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매년 5000여명씩 승객이 빠져나가는 함선이 되었다. 승객이 제 발로 나갔는지, 파도에 쓸려나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쓸려 나간 사람도 다시 그 배에 건져지기보다 차라리 구명조끼를 맨 채 망망대해에 떠다니길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나라 국민들이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충분히 이해하기 시작한 결과이다. <한국이 싫어서> 의 주인공 계나가 평생을 살아온 집에는 한때 쥐가 나왔다가, 바퀴벌레가 나왔다가, 이제는 개미떼가 나오기 시작한다. 딸의 이민을 말리는 그녀의 엄마는 ‘이 모든 게 조금씩 좋아진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단지 이 나라가 워낙 빠르게 발전했을 뿐이다. 정말 대한민국은 굉장한 속도로 모습을 바꿔왔다. 사회에 나온 지 몇 년밖에 안된 평범한 주인공이 그 변화의 모멘텀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 나라에서 그녀가 처한 상황은 앞으로도 그 겉모습만 바뀔 가능성이 높다. 쥐가 바퀴벌레로 바뀌었다고 해서 위생 상태가 ‘나아진’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학벌도 인물도 모아둔 재산도 변변치 한 개인에게 폐지를 주워 수 십 년 세월을 보내는 미래는 이미 손에 잡힐 듯한 현실이다. 그런 이들에게 대한민국에 남는 것은 나라를 떠나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할 것은 국민 개인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 자체도 대한민국식 집단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 세계 최저 출산율, 최고 속도의 고령화, 인권을 존중하고 경제협력을 도모한다는 나라들 가운데 자살률 1위인 이 나라에서 아무리 국가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해 보았자 애국심은 싹트지 못한다. 국가가 개인을 돌보지 않을수록 인재들은 하나 둘 빠져나가고 국가의 기본 구조를 지탱할 생산인구 역시 기하급수로 줄어들 것이다.


국민은 자신의 나라가 진실로 국민 개인을 위하고 사회적 협력을 가능케 할 때 그 나라에 남아 기꺼이 희생을 치른다. 철저히 개인의 삶을 보호해 국가 체제의 안정을 유지해오고 있는 미국은 영국에서 ‘독립’해 나온 국가였다. 조국인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요청한 이들은 스스로를 ‘애국주의자’라 불렀다. 아직 세워지지도 않은 국가를 위해 그들은 목숨을 바쳐 싸웠다. 미대륙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꾸려나간 150년 간의 세월은 그들로 하여금 ‘개인이 자유를 누리고 행복한 삶을 개척하는 사회’의 가능성을 직접 실험해볼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영국 정부의 강압적인 압력은 자유에 대한 감수성과 실현 의지가 충만한 이들에게 완전한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부추겼다. 그들이 조국을 떠날 용기를 내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데 성공했던 이유는 미국에 대한 충성은 곧 개인의 자유, 행복과 동의어였기 때문이다.


@ 온라인 상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춰가는 헬조선 담론



나는 대한민국이 ‘헬조선’이라 조롱 받는 이 시기를 과도기라고 믿고 싶다. 먼 거리를 전력으로 달려온 열차가 한 순간에 방향을 꺾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헬조선’이란 말로 축약된 국가 체제에 대한 혐오는 지나치게 억눌려온 것들에 대한 순간적인 욕망의 분출이라 생각한다. 청년들이 가진 자아 실현과 표현 욕구,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가정과 회사, 국가를 앞세운 기존의 집단주의적 사회 구조와 맞부딪히면서 생긴 파열음과 같은 것이다. 이는 광복 70년 역사 동안 국가 앞의 개인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지 못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아직 시대가 새로운 세대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급히 인내나 연대, 희망을 이야기할수록 헬조선 담론은 그 덩치를 키워나갈 것이다. 노력이 부족하다는 기성 세대의 책임 회피만큼이나, 정치로 뛰어들어 모든 것을 바꾸라는 진보의 목소리 역시 이 같은 현실혐오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기성 세대가 잘못 만들어 놓은 구조를 왜 청년 세대가 몸을 부딪혀 깨뜨려야 하는가 반발만 야기할 수 있다. 더욱이 반도의 분단 국가에서 군대식 교육을 받고 자란 청년 세대가 이 구조 바깥의 세상을 상상하기부터가 쉽지 않다. 청년들의 감수성과 소통 방식을 위해 시대가 함께 변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뿐이다. ‘한국의 어떤 점이 싫은지’ 그리고 ‘어떤 나라를 꿈꾸는지’.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는 개인은 스스로 어떤 삶을 꾸려나갈 것인지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설령 대한민국을 버리고 떠날지라도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성공적인 독립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한국이 왜 싫은지, 그렇다면 어떤 나라에서 살고 싶은지.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자극적인 표현과 막연한 추측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면 끝까지 남의 불행을 위안 삼아 살아가거나, 어렵게 도착한 이국에서 ‘유턴’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먼저 ‘한국의 어떤 점이 싫은지’ 이 질문에 대해 자기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던 아들이 어른이 되어, 자기 자신이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수십 년간 자라온 우리는 이미 대한민국의 일부와 다름이 없다. 자신이 혐오하고 부정하는 대상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그 생각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도 소통할 수 있어도 그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주인공 계나는 소설 속에서 한국을 두 번 떠난다. 첫 번째는 정말 한국이 싫어서. 한국에서 더 이상 못 살겠어서 떠밀리듯 나간다. 그녀는 한국 사회의 지나친 경쟁과 개인에 대한 존중 부족, ‘진짜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모습, 계층 상승의 가능성이 막힌 신분 사회가 잘못 되었다고 느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었지만 그녀는 가족, 직장만 옮기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정이나 회사가 아닌 ‘국가’를 떠나려 했던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사회구조적인 문제로서 이해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로 어렵게 도출된 답이 이민이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 자신이 원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 오랫동안 현실적인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민을 떠나서도 한국적인 사고와 습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누구보다 처절하게 영어 공부를 하며 새로 주어진 기회를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계나가 두 번째로 한국을 떠난 이유는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지’ 충분히 고민했고, 자신이 살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호주를 선택했다. 그곳에선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 일을 하고, 여자 혼자서도 안정적인 사회 경제 활동이 가능하며 어떤 식으로든 지속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보장되었다. 물론 한국에는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자, 그리고 그가 가져다 줄 수 있는 경제적 안정이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한국에서 살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고민을 거듭한 결과 자신이 안정적인 ‘자산성 행복’보다 즉각적인 ‘현금흐름성 행복’을 조금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고,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도 결국 자신이 납득할만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이렇게 먼저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원치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 객관적 이성적 합리적으로 이해한 뒤에야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 개인의 독립은 그런 질문이 충분히 해결된 뒤에야 가능하다.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나서 문득 이민을 결심하거나 그래도 한국에 남기로 새삼스레 다짐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헬조선 담론에 쉽게 휩쓸리거나 무력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오늘 힘들고 내일은 더 힘들겠지만 모레는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모레가 오기 전에 죽는다. 모레의 태양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다 . - 알리바바, 마윈

 마윈의 말 속에서 어떤 지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성공의 그날까지 쉬지 않고 도전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물결이 흘러가듯 세대는 교체된다. 헬조선 담론은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파열음이라 생각하자. 청년 세대는 어느 정도 그것을 안고 가야 한다. 부무 세대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 모두 좋은 것일 수는 없다. 현실이 버거운 사람은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왕 남기로' 결정한 청년들이라면 독립된 개인의 삶을 충분히 상상하고, 우리가 기성세대 주류 세대가 되었을 때 조금씩 그것을 실현해 나가면 된다. 우리가 살았던 대한민국이 왜 싫었는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대답을 더 분명히 하기 하기 위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미 충분한지 모른다. 오늘과 내일이 힘들어도, 내일 모레 살아 있으면 된다.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


나는 대한민국으로부터 독립을 꿈꾼다. 그리고 많은 나들이 그것을 꿈꾸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많은 청년들이 ‘헬조선’이란 표어 아래 모여 있지만 머지 않아 각자 자신만의 언어를 찾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한국이 싫은지, 그렇다면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 것 충분히 고민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날수록 '독립된 개인들의 나라' 진정한 의미의 민주국가가 올 것이다. 나는 한국이 싫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싫어하고 싶지는 않다. 그토록 싫어하는 헬조선의 모습을 어른이 된 내 안에서 발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이 보였다.


- 고은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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