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지숙 Mar 23. 2016

복종하라 그러나 생각하라

지젝, 영화 <귀향>, 한병철의 <심리 정치>

과거를 모르면서도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 레오나르도 빠두라, 쿠바의 기자  


 나는 아직 지젝을 이해하지 못했다. 2주 전 반납한 책에 대해 오늘에서야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아직까지 그의 언어가 소화되지 못한 채 머리 속을 떠도는 이 느낌 때문일 것이다. 3주 전 억지로 마지막 장을 넘기고서 책 모임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지젝이 하고 싶은 말을 100% 이해했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이 책을 통해 그는 ‘끈기 있는 이데올로기 비판적 작업을 통해 권력자들의 기반을 허물고, 비정상적으로 높은 톤의 목소리로 현존 권력자들을 고생시킬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그가 비판하는 지점을 이해하고 따라가기에 급급한 우리들이 과연 ‘끈기 있는’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나눌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이념과 이론을 통해 치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은 일정 수준의 학문적 이해와 일상적 긴장을 견뎌낼 강인한 신경을 필요로 할 것이다.   

@ 지젝과 바디우

 “복종하라 그러나 생각하라” 지젝은 칸트의 말을 우리에게 다시 전한다. 현실 권력에 복종하지만 비판적 목소리를 높이라는 그의 주문은 일견 소극적인 대응으로 맥이 빠졌던 게 사실이다. ‘현 세기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 불리는 그가 내린 처방치고는 ‘조금 약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그는 우리가 종종 생각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행동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어떤 문제(미국의 경제 위기 사태)가 애초에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따져보는 대신 그 문제에 7천억 달러를 쏟아 부는 것을 선택했던 미국 정부를 사례로 들면서 말이다. 그는 행동 없는 목소리보다는 이성적 판단에 뿌리를 두지 않은 분노적 행동에 대한 경계를 더 많이 주문했다. 그런 행동은 진보적 이성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시민들을 충격과 공포 가운데 오히려 뒤로 물러서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 영화 <귀향>
역사에 대한 울분. 영화에 대한 한숨   


 지난 3일,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자신의 블로그에 영화 ‘귀향’에 대한 짧은 평과 함께 별점 2개를 매겼다.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인 그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처를 주제로 한 영화에 이 같은 가혹한 평가를 내렸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동진은 영화 <귀향>을 보고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까? 그 역시 식민지 시대 성노예로 끌려간 수많은 여성들의 한(恨)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분명 ‘역사에 대한 울분’을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영화 속 몇몇 장면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서사구조의 완결성과 내용의 유기적 연결, 세련된 묘사와 관점, 섬세한 시선 처리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했고 별점을 2개밖에 줄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나는 영화 <귀향>을 보지 않았지만 주변 지인들의 평을 통해 그 영화의 만듦새를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지나치게 신파적 감성을 자극하는 서사 구조가 불편했다고 이야기했다. 또 다른 이는 위안부 여성의 1인칭 관점이 주가 되지 못한 부분을 아쉬워했다. 둘 다 영화 전체의 구조적 서사에 몰입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이다. 그 자리에서 눈물 몇 방울 흘릴 수 있겠지만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발전시키거나 구체적인 지향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온갖 감성적 자극에 노출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어지간한 심정의 동요로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텔레비전에 아프리카 난민의 모습이 등장하는 횟수가 늘어도 그만큼 구호 활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지 않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귀향>과 같은 영화에 한숨을 내쉬게 될 것이다. 현대인의 정서를 감동시키고 그들의 사고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감성의 호소가 아닌 이성을 자극하는 치밀한 구성과 현실적인 그림이다.  


@ 한병철의 <심리정치>
‘기분’과 ‘감정’은 다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기분(mood)’과 ‘감정’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분은 주관적이며 ‘변화’를 특징으로 하고 ‘즉각적 배설’만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 감정은 객관적, 서술적, 항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법 감정, 도덕 감정과 같은 개념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여기에 기분은 ‘반성’의 층위에 놓여 있지 않다. 행위 주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층위에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충분히 설명될 수 있고, 완결된 서사 구조를 가지며, 쉽게 변하지 않는 ‘감정’이야말로 인간의 반성을 가능한 영역이다.  


 한병철이 정의한 개념에 따르면, 지젝은 인간의 기분이 아닌 감정의 영역을 이야기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순간적인 기분에 따른 충동적인 행동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반복해서 경고한다. 20세기 일련의 혁명들이 그렇게 변질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이념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근거로 쓰이게 되었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정말로 믿지는 않는다’고 그저 상상”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먼저 지적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와 구조적인 악영향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스스로는 ‘적어도 자기 세대에는 그것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과 언제든지 자본주의적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체제에 대한 감정적 분노가 아닌 스스로 객관적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의 근거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도덕, 정치, 법 감정이야말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 <귀향>의 한계를 지적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섬세한 관점의 연출에 소홀한 매체는 그것이 아무리 민족주의적 가치와 휴머니즘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게 맞다.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일시적인 기분(감성)들의 소용돌이로 공동체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오류의 가능성과 함께 한 때의 열기로 식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비자의 기분과 감성을 공략하는 미디어의 포화 상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한 가치 판단은 논리적 이성과 완결성 있는 서사 구조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무수한 정서적 자극 가운데 진정으로 올바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회적 의제에 대해 더 많은 지지자를 더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가장 효과적인 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는 뒤로 물러서서 올바른 일을 생각하고 말할 때이니라


 나는 내가 아직까지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 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금쯤 낙관과 자부심을 가져보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난해한 설명과 참여적이고 대단히 편파적인 그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속지 않는 냉소주의자보다 오류를 범하는 철학자가 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진짜 현실주의자는 철학자들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