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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다샤 Aug 05. 2020

기억의 질감 - 탁본

[탁본에 남긴 잔혹한 기억 ⑫] 아버지의 죽음 앞에 선 김평강


주섬주섬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던 김평강 씨는 예전 같지 않은 체력 탓에 라이터 불도 여러 번 돌려 겨우 불을 붙였다. 그에게 흡연은 몇 해 전 위암 수술을 받고 난 이후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다. 그러나 주위의 잔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속상하거나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문다.



 "나야 죽어도 이미 예전에 죽었던 목숨이라 이제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아"


      

▲  삼양초등학교를 찾은 김평강. ⓒ 한톨



오늘 그와 강광보 일행이 찾아간 곳은 제주 삼양초등학교였다. 아이들이 뛰어 놀아야할 운동장이 코로나19로 텅 비어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에게 삼양초등학교 앞에서 담배를 물게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곳은 부친의 죽음이 있는 곳, 4.3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 앞 정문 주변으로 길게 늘어선 기념비, 공덕비 중에는 아버지의 공덕비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아버지 죽음에 대한 기억도 함께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 마음한켠이 불편하다.



 "일본 놈들한테 꼼짝 못하고 살다 해방된 얼마나 좋아. 그 전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회사를 했거든. 그런데 그 회사 하면서 돈을 좀 벌었어. 아 그러니까 그 돈으로 마을을 좀 잘 살게 해보자는 뜻에서 여기 삼양초등학교를 세웠잖아. 학교 말고도 마을 발전이라면 뭐든 하려고 하셨지. 아버지도 해방 후에 민보단이라는 걸 만들어서 마을 치안을 담당하고 했었어. 그러다가 4.3이 터져버린 거라. 잊지도 않아. 49년 1월 2일. 그날 아버지가 회사에서 야간근무 하고 있었는데 경찰에서 지원해달라는 소식이 온 거야. 산사람들이 내려와서 삼양초등학교에 막 불을 냈다고. 아버지하고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학교를 설립한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자식인 나도 다니고 있던 학교니 애착이 더 있었겠지. 학교에 불이 났다는 소리가 나니까 아버지랑 마을 분들 몇 명이 학교 불을 끄러 지원 나갔어. 그랬다가 산사람들에게 잡혀 죽고 말았지."


      

▲  아버지를 잃은 삼양초등학교 자리에서 탁본하는 김평강 ⓒ 한톨



▲  억울한 자신의 마음을 탁본에 적어 넣은 김평강 씨. ⓒ 한톨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공덕비를 만지며 그날의 생각에 잠시 머물렀다.



 "육지 것들이 내려와서 그 난리만 안쳤어도 제주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은 없었을 건데."



그는 아버지를 죽인 산사람들을 탓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죽음으로 삼양은 그야말로 죽음의 마을이 되었다.



 "사람들 죽고 나니까 군인들이 가만있어? 육지에서 온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 잡아다가 젊은 사람 죽이고, 젊은 사람 안 보이는 집 죽이고, 노인 아이들만 있으면 그것도 의심해서 죽이고, 경찰, 군인 가족 아니면 죽이고, 죽이는 구실도 참. 그래 여기 삼양 바닷가에서 사람들 잡아다가 엄청 죽였다니까. 우리도 아버지가 민보단 아니었으면 다 죽었을거라."



검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한 삼양바닷가는 그렇게 마음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짙은 흑빛을 띈 모래는 그날의 죽음을 추모하는 듯 했다.


      

▲  4.3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김평강 씨.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그날의 슬픔이 가득하다. ⓒ 한톨





삼양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살던 집이 있었다. 지금은 하얀 벽에 세련된 건물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예전 살 때는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볼품도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멋지네."



그곳에는 여러 기억이 남아 있다. 군 입대, 결혼, 일본 밀항, 간첩으로 조작되기 까지......



 "4.3 터지고 나서는 제주 남자들은 전부 해병대에 지원을 했어. 난 빨갱이가 아니라 대한민국에 충성하는 사람들이다 하는 것을 증명해야 하니까. 우리는 당연히 해병대로 지원해 갔다고. 그때 포항 이쪽으로 가면 전부 제주사람들. 우리 인사참모도 한국전쟁 때부터 참전했던 제주사람이라. 그래서 해병대가면 위로 아래로 제주사람들이라 참 잘해줬어."



4.3의 최대 피해자인 제주사람들이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임을 입증하기 위해 더욱 보수적으로 행동해야 했던 건 비단 제주만의 일은 아니다. 강릉이나 대구와 같이 해방 전후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은 더욱 커다란 탄압을 받았고, 이 탄압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정권의 입장을 지지하는 보수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  해병대 시절 잠시 휴가 중에 만난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찍은 기념사진. 그는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해병대 입대로 증명했다고 한다. ⓒ 변상철



 "해병대 입대하고 휴가를 나왔어. 그때 정복을 입고 자랑도 할 겸 친구들하고 만나 술을 먹는데 옆 동네 아이들이랑 같이 먹게 된 거야.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눈에 딱 띄더라고. 외모도 세련되고. 나중에 알고 보니 시내에서 미용실을 한다고 했어. 그때 미용사면 대단한 전문가지."



후에 아내가 될 사람을 처음 만난 그날, 그들은 약혼을 하고, 군에 있는 동안 결혼을 했다. 친구들은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 준다며 몇날 며칠 잔치를 열어주었다. 특히 결혼식의 백미는 친구들이 만들어 준 '꽃터널'이었다.


      

▲  김평강과 아내 양정옥의 결혼 사진. 친구들이 손수 만들어 준 꽃터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 변상철





그렇게 사랑했던 아내를 맞이했지만 평생을 고생길만 열어줬다고 그는 미안해했다.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일본으로 밀항해 수십 년 고생만 시키고 돌아와서는 간첩으로 몰려 몇 년을 옥바라지 하며 아이들 키워낸 것이 그저 미안하다. 지금도 아내는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작은 아파트 지하에서 반찬을 만들어 팔고 있다. 무릎이 좋지 않아 거의 걷지 못하고 끌고 다니다시피 하면서도 그녀는 매일 새벽처럼 나가 일을 한다. 김평강은 본인 하는 일은 없어도 가능하면 가게에 나가 같이 있으려 한다. 그건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해서이다.



모임이 끝나고 김평강의 처제가 일하는 '화성식당'에서 각재기국을 시켜 먹는데 전화가 왔다. 김평강의 아내였다.



 "국장님, 남편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지요? 그래도 이렇게 데리고 다녀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남편이 요즘 다리도 아프고 혼자 있으니까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고 혼자 말을 막하니까 무섭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탁본 나가고 부터는 사람이 좀 밝아지고 눈빛도 좀 밝아지는 것 같아요. 수상한집에서 뭔 행사가 있으면 자주 데리고 나가 주세요. 부탁합니다.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잘 부탁합니다."


      

▲  제주시내에서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김평강 씨의 아내. 자신이 적어 놓은  '즐겁게 일하고 건강하게 살자'는 글씨처럼 부부의 행복을 기원해 본다. ⓒ 변상철



아내 전화를 받고 있는 동안 옆에서 듣고 있던 김평강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문다. 그 뒤를 강광보, 강희철이 따라 나선다. 기억이 흐릿해지는 그들은 왜 과거의 기억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일까?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기억보다 고통스러운 기억,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을 찾아다니며 기억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그들에게 오늘 하루의 기억은 오늘 어떤 질감으로 기억될까? 오늘 하루 길이 저들에게 평화가 깃드는 하루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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