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다샤 Aug 10. 2020

동굴 속의 호수

4. 가스, 루베

4.      

'에이. 변사사건 하나 해결 못해서 서울에서 여수까지 오라 가라 하다니. 여수경찰도 어지간하다 진짜'     

여수로 내려가는 내내 비가 내리고 있다. 수사지도관 이혁은 장마 길에 여수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밀려왔다. 변사체의 신원조차도 파악 못하고 일주일째 쩔쩔매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사건 발생 장소인 여수 돌산 대미산을 돌아 변사체가 안치되어 있다는 마을 병원을 찾았다. 병원은 동네 의원 수준의 작은 병원이었다. 병원에 들어서자 정 형사가 나왔다.      

'이 지도관님, 어서 오십시오. 빗길에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예' 이 지도관은 짧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사체는?'하고 물었다.     

정 형사는      

'아이고, 지도관님 숨 좀 돌리시고 천천히 하시지요. 뭘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우선 식사라도 하시고...'     

'됐습니다. 사체가 있는 곳부터 안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담당의사의 사인검안서도 함께'라고 짧게 대답하자 정 형사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사이코 하나가 내려왔구나 생각하며...     

정 형사가 검안서를 건넨 뒤 사체가 보관되었다고 하는 곳까지 차량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검안서를 보니 사인은 '액사(질식사)', 사망 추정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최초 발견자는 마을에서 복무하고 있는 방위병, 검안서 내용대로라면 사인에 영향을 줄만한 특별한 외상이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15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해 도착한 곳은 의료시설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작은 동산이었다.      

'설마?' 하고 생각했으나 곧 그 불길한 예감은 사실로 맞아떨어졌다. 5분쯤 올라가니 작은 봉분이 있었고 그곳에 다다르자 정 형사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이고, 고거 올라왔다고 숨이 차네. 운동 좀 하던가 해야지. 지도관님 여깁니다.'     

'부검 없이 변사자를 여기 묻었습니까?'     

'동리에서 용한 의원님이 검안을 다 끝냈으니 특별히 더 부검할 게 있나요? 검안의사가 자살이라고 결론 내줬고, 의학적으로나 법적으로 절차도 다 마쳤으니 문제 될 건 없....'     

'누가 문제 될 게 없다고 변사체를 여기다 묻기로 결정한 겁니까? 서장인가요? 아님 시경 청장님인가요? 아님 정 형사님인가요?'     

'아니 그게 의사소견서를 받아 담당자인 제가 기안을 올려서 서장님께 보고 드리고 목포지청 검사님께 수사지휘받아가지고서는...'     

'그 검사는 부검 없이 변사체 처리한 걸 알고나 결재한 겁니까?'      

이혁은 정 형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사체 신원파악도 안 되어 있고, 사망원인도 파악되지 않은 마당에 변사체를 묻어요? 정신이 있는 겁니까?'     

크게 흥분했던 이혁은 이 작은 마을에서 법의학적 설명을 해 본들 알아먹지도 못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지 이혁의 매서운 지적에 정 형사는 올라오며 흘렸던 땀보다 몇 배의 땀을 흘리며 쩔쩔매고 있었다.      

이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사체를 다시 꺼내십시오. 제가 직접 검안과 사후 부검을 담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망 현장에서 발견되었던 유류품들을 전부 제게 가져다주십시오. 즉시 부탁합니다.'     

그러나 정 형사에게 이 말은 부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서릿발 같은 전장의 지휘관이 내뿜는 포효와도 같았다.      이혁의 지시에 따라 즉시 봉분을 열고 변사체를 꺼냈다. 암매장한 지 일주일 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여름의 기온과 습기로 사체는 백골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다행히 장기의 상당 부분은 체취가 가능한 상태였다. 추출 가능한 장기의 일부를 떼 내어 시료병에 담았다. 아울러 외상의 흔적을 찾기 위해 두개골에서 하복부에 이르는 절개를 실시했다. 목뼈의 부러짐이 발견되었다. 턱 아래 목에서 귀 쪽으로 이어진 의흔(縊痕), 전형적인 완전의사의 모습이었다. 이 부분에서 특별히 수상하다고 의심되는 점은 찾기 어려웠다. 이혁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발목 부분의 상처였다. 양 쪽 발목 윗부분의 동일한 위치에 비슷한 크기의 상처가 5센티미터 정도의 폭으로 생긴 것을 확인하였다. 변사자가 스스로 죽기 위해 산을 올라오다 생긴 찰과상 정도의 상처는 아닌 것이다. 날카로운 금속과 같이 단단한 물질에 의해 생긴 상처로 1센티미터 이상의 깊이의 상처로 보였다. 적어도 이것은 좌창이나 좌열창의 상처로 추정된다. 이것은 사망의 직접적 연관은 없을지라도 사망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다. 즉, 변사자 스스로가 사망한 전형적 완전의사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사망된 후 완전의사로 위장된 위장의사일 가능성이 높다.      

이혁은 '좀 더 초기에 왔더라면 일혈점이나 정액반응 등을 통해 쉽게 판단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이미 부질없는 것이다. 주어진 현재의 정황만으로 이 사건을 결론 내야 한다. 그때 변사자의 유류품을 가지고 정 형사가 도착했다.           

가져온 것은 타다 남은 수첩 케이스 일부와 주민등록증 비닐 일부, 신발, 바지와 셔츠 등이었다. 발견 당시 지문도 채취할 수 없을 만큼 사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변사자의 신원을 특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혁은 유류품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정 형사는 '변사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뭐라도 단서가 나와야 뭘 찾아보기라도 할 텐데. 원. 이러다가 미제사건 하나만 더 떠안는 것 아닌가 몰라요.'     

정 형사의 혼잣말을 무시하며 이혁은 유류품 확인을 계속해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허리를 천천히 들어 일어서며 이혁이 중얼거렸다.     

'인천 연안가에 있는 가스충전소들을 좀 뒤져보세요. 거기서 최근 며칠간 실종되거나 가출했거나 행방불명된 20대 젊은 남자가 있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예?'     

뜬금없는 이혁의 말에 정 형사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인천 연연가의 가스충전소를 왜요?'     

'뭐 제가 정 형사님에게 일일이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니 그래도 수사협조를 받으려면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     

‘일일이 설명을 해야 하니 번거롭네요. 먼저 타다 남은 수첩을 보세요. 107 루베라는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 싸이폰 2‘라고 쓴 것 보이시죠?'     

'네, 근데 그게 무슨 단서가 되는지'     

'루베라는 단어는 보통의 부피를 나타내는 세제곱미터를 말하는 일본식 말입니다.  건설현장에서 시멘트나 콘크리트 양을 계산할 때 쓰이기도 하지만 특히 가스의 사용량을 나타내는 단어로 많이 쓰입니다. 그리고 ‘싸이폰 2’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가스용기의 종류인 ‘사이펀’ 가스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2’라는 숫자는 개수를 적어 놓은 것이고요. 그런데 저 수첩의 필체가 변사자가 기재한 것이라면 그것은 변사자가 건설이나 가스와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다고 추측했습니다. 물론 그렇다면 사무직일 수도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만. 그런데 신발의 바닥을 보고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여기 신발 바닥의 자국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이혁이 들어 올린 신발의 바닥은 일반적인 신발의 바닥 모양과는 다르게 사선이나 횡 모양의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사선이나 가로 모양으로 신발 바닥이 닳았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바닥의 모양이 이렇게 닳았다는 것은 바닥이 이렇게 닳게 되는 일을 자주 접하게 된다는 것인데요. 옆으로 걷게 되는 일을 하며 바닥을 걷게 되고 또 이렇게 깊은 자국을 내며 신발이 닳을 정도로 힘을 주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순간 정 형사는 옆으로 힘주어 걷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았으나 잘 떠오르지 않았다.      

'가스배달입니다. 가스배달원들은 수 킬로그램에서 백 킬로그램이 넘는 여러 종류의 가스를 하루에 수십 통에서 수백 통까지 들어 올리고 내리며 그것을 식당이나 아파트까지 옮기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무게가 무거운 가스통을 들 수 없으니 그들만의 방법으로 옮기게 되는데 바로 옆으로 비스듬히 세워 굴리듯 옮기는 것입니다. 그때의 자세는 사선이나 횡보의 모양으로 걷게 됩니다. 가스통을 옆에서 굴려가야 하니까요.'     

순간 정 형사는 '오, 그러네요'라며 동조했다.     

'티셔츠의 가슴 부분을 보면 가스통을 들고 내리거나 굴릴 때 가슴으로 살짝 받치면서 걸을 때 생긴 환형의 둥근 띠 같은 자국이 보이지요?.'     

'그렇지만 그런 가스배달원은 전국 어디에라도 있는 것인데 왜 하필 인천 연안이라고 생각하시는 건지..'     

'107루베입니다. 한 달에 몇 천 루베 이상을 쓰는 식당이나 병원과 같은 큰 건물에서 쓰는 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은 양입니다. 일반 가정집에서 난방이나 조리로 쓰는 양인 거죠. 그런데 6월이라면 보통 남쪽 지방은 난방을 하지 않으니 한 달 난방으로 100루베 이상의 가스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중부지역 이상이라고 예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신발 발목 부근 끈에 뽀얗게 먼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이시죠? 괜찮으시다면 손으로 찍어 맛을 보세요.'     

'예, 맛을 보라고요?'     

정 형사는 황당하다는 듯 이혁을 쳐다보았으나 이혁은 분명 진지하고 단호했다.     

마지못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신발 끝을 만졌다가 다시 혀로 대보았다.      

'엣, 퉤퉤!'     

'네, 소금입니다. 바닷가인 거죠. 중부지역 이상의 바닷가에 위치한 가스충전소에서 일했을 가능성으로 좁혀진 거죠. 그런데 소금이 신발 끈에만 묻은 것이 아니라 신방 깔창 사이사이에도 꽤 많이 묻어 있어요. 그건 소금을 많이 쓰는 곳에 가스를 배달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어요. 5월에서 6월에 바닷가에서 소금을 많이 쓰는 곳, 5월 중순에서 6월 사이에 조기 떼가 연평도 근해에서 어장을 형성하면 전국 각지의 어선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거든요. 이때 바로바로 조기를 절여 놓아야 하기 때문에 각 어선에서는 소금을 잔뜩 싣고 갑니다. 더불어 배가 한번 출항하면 보름이나 한 달씩 머무르기 때문에 출항 전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자재들을 가득 싣고 나가게 되죠. 물론 조리를 위해 필요한 가스도요. 사이펀 가스통 2개는 보름 정도 조리를 할 수 있는 양이니까요.'     

이 순간 정 형사는 '아~' 하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럼 인천 쪽은 정 형사님이 맡아 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동굴 속의 호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