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 허탈 허무 자괴 자멸 내가 오전에 느꼈던 감정들. 행정실 주무관님이 돌아가셨다. 정확한 사인은 모르지만, 갑작스레 어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아침에 업무 메신저 쪽지로 받았다. 내가 아는 그분이 맞는지, 불과 그저께 시설 점검해주시러 오셨던 그분이 맞는지, 오타는 아닌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믿기지 않았다. 그 건강하셨던, 친절하셨던, 이 삭막한 건물 내 몇 안 되는 편하게 느꼈던 분이 갑작스레 이렇게 가시다니. 쪽지가 몇 번 더 왔다. 코로나로 인해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할 계획이라 했다. 메신저로 계좌번호를 전달받았다. 다른 때보다 망설임 없이 조의금을 이체했다. 아마도 그분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에대한 자책과 죄책감을 덜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체자 이름에 그분 이름 석자가 뜨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망자에게 계좌로 조의금을 이체하다니. 아직 살아있는 계좌처럼 그분도 아직 살아계신 것 같았다. 결혼식에 가는 친구에게 축의금을 이체하는 듯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함께 울고 슬퍼하고 명복을 빌어주는 단계는 생략된 채 실체 없는 숫자만 찍어 보내는 이 과정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전 내내 동료들과 함께 허망하다, 믿기지 않는다 이야기하고 얼마 동안 우리는 다운되어있었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일하다 쏟아지는 공문들과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나는 종종 웃기도 했고, 배가 고프다는 생각도 했고 9월부터 2호봉이나 오른다는 사실에 기뻐 엄마한테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주무관님이 안 계시면 그간 그분이 담당하셨던 시설물에 관한 일들은 그럼 나한테 오는 건가, 당장 9월 말에 놀이시설 점검 나오는 건 어쩌지 하고 속물스러운 속마음이 신물처럼 종종 올라오기도 했다. 정신없이 8시간이 흘러 퇴근할 무렵. 메신저를 끄려고 화면을 들여다보자, 순간 'on'에 빨갛게 불이 들어와 있는 수많은 이름들 중에서 유일하게 까맣게 꺼져있는 그분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돌아가신 게 맞는 걸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퇴근시간. 주차장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벼운, 유쾌한 인사 소리들. 그들을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자격은 나에게 없었다. 나 역시도 이미 일상으로 돌아와 버렸으니까. 늘 그렇듯 컴퓨터를 끄고 신발을 신발장에 넣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동료들에게 미소 지으며 내일 보자고 인사하고 나왔다. 언제까지나 슬퍼할 수는 없잖아. 돌아오는 차 안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가 죽으면 나의 세상은 끝이겠지만, 이 세상은 계속되겠지. 나는 세상의 중심도 주인공도 아니기에. 나도 잊힐 것이고 다들 내가 없는 세상에 금방 익숙해질 것이다. 내가 없어진다 해서 세상에 달라질 것이 뭐 있을까? 두려워졌다.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세상, 어제오늘 달라진 것 하나 없이 그대로인 세상. 누군가에게 잊힌다는 게 두려워졌다. 죽음도 곧 익숙해지고 그러면서 잊히는 거야.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고 나는 완전히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원글은 작년 가을인 2020. 09. 10. 그리고 오늘 우연히 이 글을 보다 그동안 그분의 죽음에 대해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 글이 쓰고 싶어졌다. 이제 그분의 빈자리에 새로운 분이 오셨다. 그분만큼이나 따뜻하고 인자하신 분이 오셔서일까? 그분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잊고 지냈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라는 말이 진리임을 새삼 느낀다. 모든 것은 익숙해지고 그러면서 잊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