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차에서 내린 짐들을 둘러보며 오늘부터 자신이 살게 될 오피스텔의 꼭대기층을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세입자인 것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공사장 한복판의 시끄럽고 좁아터진 원룸 방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부모님을 배웅하고 마침내 완성된 자신만의 아늑한 공간을 돌고 또 돌며 뿌듯함에 다리가 아픈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 집에서 가장 애정 하는 테라스 의자에 기대앉아서 해가 지는 전경을 눈에 담았다. 긴장이 풀린 그녀는 그제야 팔, 다리가 둔해지고 허리가 아픈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 조용한 집이 아주 마음에들었다. 이게 얼마만의 고요인가? 그녀가 이 집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이 집은 이 건물에서 최고층이며 이웃집 모두 사무실이었다. 밤에만 집에 머무는 그녀에게는 낮에 이웃이 사무실이라 시끄럽든 말든 상관없었다. 불면증이 심한 그녀가 집을 택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조용한 가였다. 그녀는 부동산 중개인에게 조용한 집을 원한다고 하였고 이 집을 추천받았다. 이 집은 층간 소음도 없고 밤늦은 시간에 인기척 하나 없을 거란 말에 그녀는 고민 없이 바로 계약금을 보냈다. 그녀는 과연 개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 공간이 편안하게 느껴졌고 스르르 눈이 감기는 걸 느꼈다. 그녀는 잠시 그렇게 행복감에 취해 있었다.
14F 그가 오른손에 감겨있던 붕대를 풀자 검지 손가락이 하얗게 불어 있는 상태로 어색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내 그의 열 손가락은 한 몸이 되어 빨간 불이 켜질 때마다 운전대 위에서 꼼지락꼼지락 춤을 췄다. '오늘은 집에 가자마자 손가락 운동 좀 해야지.' 그는 그동안 손가락을 다쳐 피아노 뚜껑을 꽤 오랫동안 열지 못했다. 게다가 오늘처럼 기분이 우울한 날에는 드뷔시와 사티가 그를 위로해줄 것만 같았다. 그는 피아노를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배웠다. 그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피아노를 더 이상 배우지 못했지만 피아노만큼은 그를 위해 팔지 않고 끝까지 남겨두신 부모님 덕분에 그의 손은 굳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아노를 전공하지 못하고 공대에 간 것이 한이 되었다. 그래서 취직 후 곧바로 피아노 레슨을 쭉 받아왔으나 아무래도 전공자만큼 표현력을 갖고 깊이 있게 치는 것은 그에게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연습했고 열심히 들었다. 더욱이 최근 발매된 조성진의 드뷔시 앨범은 그에게 연주하고 싶은 충동을 들게 하였다. 최근 그는 퇴근 후 자정까지 연주하다 피아노 위에서 잠든 적도 있었다. 그러던 찰나, 그는 야구공을 잡다가 검지를 접질렸고 그렇게 2주간 피아노를 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피아노 뚜껑을 열고 의자 위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가지런히 열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이 하나하나 건반을 누르는 무게감을 느꼈다. 그는 드뷔시를 연주하며 '달빛'에 취했고 연이어 이어진 '아라베스크'의 황홀경에 빠져버렸다.
그가 무아지경으로 사티의 '나는 당신을 원해요'의 끝 부분을 향해 달리고 있을 무렵 벨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는 연주 중에 누군가 말을 걸거나 전화가 오는 것이 제일 싫었다. 몰입과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깨어나는 느낌이 무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남아 있는 부분을 완곡하려 했으나 이내 소리의 출처가 궁금했던 그는 연주를 대충 마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집안을 둘러보았으나 그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똑같은 소리가 다시 어디선가 울렸다. 그는 그제야 그 소리가 인터폰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여기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로 인터폰이 울린 것은 처음이었다.
"1409 호시죠? 여기 경비실인데요 시끄럽다고 항의 들어왔습니다"
15F 그녀는 알람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그녀가 알람을 듣고 깬 것은 직장인이 되고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늘 새벽에 일어났다. 피곤해도, 아무리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항상 새벽 그 시간에 눈이 떠졌다. 그리고는 다시 잠에 드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그런 날이면 그녀는 하루 내내 몸이 힘들었다. 특히 그녀는 잠자리가 바뀌면 심하게 잠을 설쳤다. 그런 그녀에게 이사 온 첫날 푹 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녀의 머릿속에서 안도감이 걷히자 어젯밤 그녀가 했던 고민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녀는 어제 걱정했었다. 전에 살던 원룸과 달리 이곳은 조용할 거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전에 살던 원룸에서는 새벽까지 쿵쿵 거리는 발소리와 개 짖는 소리 때문에 귀마개를 껴야 겨우 잠이 들었던 터였다. 그녀는 층간 소음 때문에 불면에 시달릴 때면 밤에 작은 소리만 들려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2년 후에는 맨 꼭대기층으로 집을 얻자고 다짐했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그런데 위층이 아닌 아래층 때문에 이렇게 시끄러울 줄이야. 그 소리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진원지를 찾아 어젯밤 9시에 14층으로 내려갔을 때 유독 1409호 문 앞에서 피아노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아래층이 궁금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밤늦게까지 피아노를 쳐대는 예의 없는 사람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호기심이었다. 그녀는 알고 싶어 졌다. 그녀가 좋아하는 드뷔시와 사티 곡을 저렇게 칠 수 있는 사람이. 생각해보니 그렇게 밤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좋아하는 드뷔시와 사티의 음악이라면 그 소리를 못 참을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그런 소음 속에서도 그녀는 숙면을 취하지 않았는가? 다시 생각해보니 그 피아노 소리는 소음이라기보다 연주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녀는 이사 온 첫날 섣불리 경비실에 전화를 건 것이 후회되었다. 그녀는 서랍을 열었다.
14F 그는 현관문 앞에서 번호키를 누르려고 하다 손잡이에 하얀 비닐봉지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1409 숫자 밑에 무엇인가 붙어 있는 것도 발견했다. 그가 몸을 움직이니 현관문 위 조명이 켜지면서 문에 붙어있는 쪽지가 보였다. 아마도 어제 경비실에 항의했다던 사람의 흔적인 것 같았다. 그는 전혀 몰랐다. 그의 이웃 중 가정집이 있었을 줄은. 이 건물 대부분은 모두 사무실이라고 알고 있었고 그는 몇 달 동안 자유롭게 피아노를 쳐왔었다. 심지어 청소기를 밤 11시 넘어 돌린 적이 많았다. 그는 어제 항의 전화를 건 사람은 아마도 최근 이사 온 사람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쪽지에 무슨 말이 적혀 있을까 긴장하며 꺼졌다 켜졌다 하는 불안한 불빛 아래서 단숨에 쪽지를 다 읽어버렸다. 이내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쿵쾅 거리던 심장이 어느새 가라앉은 것을 느끼고는 비닐봉지를 들추어 안을 살펴보았다. 그는 쪽지를 남긴 사람이 궁금해졌다. 글씨체와 비닐봉지 속 물건을 볼 때 여자인 것 같았다. 그는 이 마음씨 착한 여자의 모습을 상상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15F 그녀는 그날 이후부터 쭉 들려오지 않는 피아노 소리에 의아했다. 자신이 괜한 일을 한건 아닌지, 자신이 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닌지 마음이 쓰였다. 그래도 1409호에 찾아가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자신은 없었다. 그녀는 고민하였다.
14F 그는 현관문에 붙어 있는 두 번째 쪽지를 보고 환하게 웃음 지었다. 그는 이 쪽지를 붙인 사람이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고, 그 길로 1층에 있는 우편함으로 달려갔다.
1F 그는 다른 사람의 우편물을 만지는 것은 죄스러웠으나 그녀가 어디 사는지, 누군지를 아는 방법은 이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장에 달린 cctv를 의식하고는 대충 눈으로 이웃들의 우편물을 훑었다. 14층, 그리고 13층. 모두 사무실이었다. 그리고 15층까지도... '어. 아니다.' 그는 유일하게 수취인이 ##상회, ##총회, ##물산이 아닌, 여자 이름인 우편함을 발견했다. 1509호. 받는 사람이 '***' 그녀다! 나에게 쪽지를 주고 간 사람.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는 그렇게 복도의 불이 꺼진 줄도 모르고 1509호 우편함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또각또각 소리와 함께 공동 현관문이 스르륵 열리며 사방이 환해졌다.